지난주, 10월의 마지막 날에 모 대학에서 ‘창의적 공간디자인을 위한 생성형 AI의 활용’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오랜 준비와 여러 번의 리허설을 거쳤기에 기대가 컸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기대만큼 뜨겁지 않았다. 다만 두 명의 학생이 특정 기능에 대해 질문을 해주어 작은 위안을 삼았다. 또 네 분의 교수님이 함께 참석해 생성형 AI의 효용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이 기술이 학생들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신 것도 힘이 되었다. 학생들의 솔직한 피드백을 듣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상호작용을 이끌어내지 못한 내 강의 능력이 부족했던 탓일 것이다. 나는 이 특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일을 치른 후 마음 한편에 남는 아쉬움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우연히 만난 역사 속 인물이 이 고민에 위로를 주었다.
그 만남은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였다. 무료 야외 음악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박물관을 찾았고,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선율이 내 메마른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음악회가 끝나고 무심코 들른 실학박물관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전시를 보게 되었다. 자산어보는 실학자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집필한 어류도감이다. 사대부 양반이 어류도감을 썼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지만, 정약전이라는 인물의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에도 놀랐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겨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약전은 오직 ‘자산어보’ 1책 3권과 ‘표해시말’만을 남겼고, 전해지지 않는 몇 가지 학습서 정도만 알려져 있다.
정약용이 자신의 저술을 할 때 형에게 의견을 묻고 감탄했다는 기록을 보면, 정약전은 상당한 학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이 잘 아는 성리학이 아닌 어류 연구에 매진했을까? 그가 성리학자였기에, ‘자산어보’에 실린 많은 내용은 흑산도 섬사람들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오랜 기간 동안 탐문과 검증이 필요했을 것이고, 수년 동안 꾸준히 이 책의 저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민들의 생업에 큰 도움이 될 연구였지만, 당장 효용이 발휘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전은 해양생물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두면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에게 해양 생물 연구는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립된 흑산도에서 어민들에게 중요한 생계수단인 어류가 학문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고, 실학자로서 이 일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여긴 것이다. 그의 연구는 그가 어류 전문가라서가 아니라, 성리학을 학습하며 배운 학문 정립의 체계를 바탕으로 섬사람들의 경험 지식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외딴섬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서적을 참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오로지 자신의 학문적 자세와 제한된 지식을 바탕으로 어류도감을 완성해 나갔다.
그에게 시간이란, 유배라는 고립 속에서 얻은 유일한 자산이었고, 부족한 전문성을 극복할 힘이었다. 누구의 칭송도, 빠른 진전도 없이 묵묵히 일에 매달렸던 그의 끈기는 경외심을 자아낸다. 만약 그가 자신의 부족함과 처지를 생각했다면 ‘자산어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난 6개월 동안 50대 실직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아내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가족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길이라 여기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빠르게 배우거나 잘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석사와 박사 과정을 통해 학문적 체계화와 분석 습관을 배운 것이 나의 자산이다. ‘생성형 AI’라는 새로운 도구가 전문 창작자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아직 정확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나는 그것을 연구하고 정립하며, 참된 가치를 쌓아가려 한다. 한두 번의 시도로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 나의 목표다.
특강을 마치고,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1박 2일 캠핑을 다녀왔다. 양갈비와 새우 바비큐로 배를 채우며 힘든 시간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캠핑 장비를 꺼내보니, 투명했던 우레탄 가림막은 백화현상으로 얼룩졌고, 아끼던 나무 테이블은 일부가 부서져 있었다. 인생의 침체기 동안 장비들도 변해버린 걸 보니 씁쓸했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해결책은 있었다. 우레탄 가림막은 약간의 비용으로 투명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테이블은 주민센터의 무료 공구 대여 서비스를 이용해 고칠 수 있었다. 정약전 시대엔 인터넷이 없었지만, 그는 섬사람들로부터 지혜를 얻었을 것이다.
이 작은 경험으로 깨달았다. 전문가냐 아니냐를 고심하기보단 내가 가치를 두는 것에 집중하면, 해결 방법은 어딘가에 있다. 오늘의 문제는 내일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참된 가치는 쌓이고 커지며, 해결책은 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