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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Feb 07. 2021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 <승리호>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한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SF의 불모지였다. 외국에서야 '스타 트렉'이나 '스타 워즈' 같은 우주를 무대로 하는 굵직한 SF 드라마 시리즈나 영화가 몇십 년 전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이런 '우주 시리즈'가 다른 장르에 비해 힘을 쓰지 못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할리우드에 집중되는 거대한 자본이 한국으로 향하지 않았을뿐더러, 우리나라 영화사를 돌아볼 때 한국형 SF는 제대로 된 한 방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제작사가 첫 삽을 뜨기 꺼려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이 연출과 제작을 맡은 영화 '옥자'와 '설국열차'로 미루어 보아 한국 감독들 역시 점점 SF의 기본적 문법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영화 '인터스텔라', '마션', '그래비티' 같은 우주물은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또, 우리에게 익숙한 아이언맨이나 토르 등이 속해있는 MCU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영화 시리즈와 그 안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성적은 한국이라는 시장 역시 제대로 만든 작품만 있다면 충분히 우주를 무대로 하는 SF물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선례로 충분하다. 게다가 최근 넷플릭스와 왓챠에 이어 애플과 쿠팡까지 OTT 서비스에 뛰어드는 상황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영화와 드라마를 이용자들이 접할 수 있는 환경도 SF의 약진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승리호>가 등장했다. '승리호'는 우주 쓰레기를 모아서 팔기 위해 특수 제작된 우주선이다. 지구가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환경으로 변해버린 2092년, UTS라는 우주 개발 회사는 위성 궤도에 UTS(Utopia above the SKY)라는 곳을 조성하고 지구의 선택된 5%의 인간만 이 곳에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인간은 다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여전히 모래 폭풍과 방사능이 넘쳐나는 지구에 있었다. 이들은 궤도 위로 올라간 사람들과는 달리 '비시민'으로 분류되어 지구에 남겨졌다. 이는 UTS의 CEO인 제임스 설리반의 생각에 따른 것으로, 2092년 기준으로 152세인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족들을 모두 잃었던 경험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과 본성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설리반은 인간의 더러운 본성이 상대적으로 덜 드러나는 5%의 인간을 선별하여 UTS로 보내고, 나머지는 지구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영화 초반에 회사를 방문했던 기자 중 한 명은 이 선택에 반발하지만, 그 역시 나중에 설리반에 의해 타의로 다른 기자를 살해하게 되자 이기적인 인간은 필요가 없다는 설리반의 논리로 인해 역으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제임스 설리반의 UTS가 조성한 2092년의 우주는 그의 비뚤어진 가치관을 토대로 선택받은 소수만이 양질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세계였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김태호(송중기) 역시 한때 UTS가 선별한 5%의 인간 중 한 명이자 천재적인 우주선 조종사, 그리고 UTS 기동대장이었다. 그러나 불법 이민자를 사살하는 작전 중에서 어린아이를 찾게 되어 대신 키우고 난 뒤, 그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명령 불복종 혐의를 받아 UTS에서 쫓겨나 딸과 함께 떠돌아다니게 된다.



어느 도박장에서 일어난 우주 쓰레기 충돌 사고로 인해 순이를 잃어버린 후, 그는 딸을 찾기 위해 승리호에 합류한다. 거기엔 과거 UTS 지니어스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입양되어 많은 연구를 했으나 제임스 설리반을 살해하기 위한 해적단의 선장이 되어 쫓겨난 이후 승리호에 들어온 '장 선장', 지구에서 마약 밀매조직을 운영했던 '타이거 박', 군사용 로봇이었던 '업동이'가 있었고, 그들과 함께 김태호는 우주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돈벌이는 수월하지 않았다. 일을 하면 할수록 쌓여가는 빚은 언제나 그들의 고민거리였고 한탕하기 위해 위험을 부담하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수배령이 떨어졌던 꼬마 폭탄 로봇 '도로시'를 만난 이후로 모든 상황이 뒤바뀐다.



도로시를 찾는 UTS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쫓는 '검은 여우단'은 승리호 선원들에게 거금을 약속한다. 이는 그동안 쌓였던 빚을 한 번에 청산하고 순이도 찾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강선장이 도로시는 사실 폭탄 로봇이 아닌 나노봇이 투여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그들은 고민에 빠진다. 게다가 검은 여우단과의 접선 장소를 뒤쫓아온 UTS 기동대에 의해 도로시를 다시 빼앗겨 인질로 잡히게 되자, 승리호 크루들은 돈과 목숨을 사이에 두고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직면한다. 지구를 모두 날려버릴 수 있는 시한폭탄이 적재되어 있는 우주선 안에서 도로시는 여전히 울고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승리호 같은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험과 전쟁을 담은 SF, 그중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 콘텐츠를 이젠 한국 영화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만 그동안 웹툰이나 웹소설, 게임 등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SF를 제대로 된 영화로 만들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SF 문학을 인정하지 않는 환경 때문이다.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SF물은 문예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고, 설사 전문지가 생겼어도 자금난으로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윈고를 실을 기회가 있어도 작가가 자비를 부담해야 했기에 SF를 주로 하는 작가는 점점 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최근 SF 작가 모임인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나 한국SF협회가 생기고, 김초엽 작가의 수상과 인기 덕분에 문예지도 게재를 허락하는 등 SF물에 대한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SF 영화의 문법이 한국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점도 살펴봐야 한다.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스타 트렉'이나 '스타 워즈' 시리즈의 경우, 각각 1966년과 1977년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뒤이어 나오는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수많은 미디어에서 인용, 패러디되었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인기 영화 시리즈가 아닌 미국의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미국과 달리 한국은 이러한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한국은 오히려 중국이나 홍콩 같은 외화에서 영향을 받아 누아르물이 많은 인기를 끌었고, 상대적으로 SF 영화나 드라마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래도 한국은 드라마에서 점점 SF의 향기를 입혀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것이 정통 SF는 아닐지라도, 한국의 제작사들은 꾸준히 타임슬립이나 괴물, 로봇, 재난물 같은 가상의 과학이나 가설, 비현실적인 설정을 활용해 각종 콘텐츠를 만들었고, 관객은 이에 호응했다. 이제 관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SF라는 이름의 가랑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건물을 휘감는 커다란 이무기와 한강에서 뛰어나온 괴물, 두산 베어스에서 야구하는 커다란 고릴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가슴에 칼이 꽂힌 도깨비와 별에서 온 남자도 한국 관객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승리호가 우리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과연 승리호는 한국형 SF물의 흥행을 이끄는 선봉의 기수로 자리매김하게 될까? 아니면 그저 장르의 승리를 위한 또 다른 패배작이 될까?



아마 결과는 승리호가 사용한 미래의 과학과 현재 사회의 연결 고리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판타지와 달리 SF는 과학과 기술에 기반한다. 인터스텔라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도 바로 단순한 SF물이 아닌 실현 가능한 미래를 기반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워즈나 블레이드 러너가 그저 뛰어난 과학적 고증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전이라 칭송받는 영화는 아니지만, 'Sci-fi'라는 이름에 걸맞게 실현 가능한 과학적 이론을 기반으로 한 미래를 제시한 인터스텔라의 성공은 분명 무시할 수 없다.그리고 이러한 과학은 인간과 맞닿아야 한다. 아무리 철저한 고증이 이루어진대도 휴머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과학 다큐멘터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 인간을 향할 때, 이야기는 힘을 얻는다. 영화 속 김태호는 딸 순이에게 약속한 '좋은 사람' 이 되기 위해서 분투한다. 이는 김태호가 스스로에게 내린 시지프스적 고통과 비슷해 보인다. 우주 어딘가로 떠내려가 버린 딸을 찾기 위해 자신이 믿던 '좋은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과학적 설정은 겉보기에 화려했으나 알맹이가 없었다.



그러나 도로시가 사실 로봇이 아닌 인간 '꽃님'이며, 그녀를 찾는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김태호는 이전과는 다른 식으로 승리호를 몰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부재한 제임스 설리반과 대비된다. 열등한 유전자를 모두 몰살시키기 위한 지구 파괴 작전을 세운 그는 결국 승리호와 다른 쓰레기 수거 우주선의 협동으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 비록 영화의 결말을 위한 과정이 뻔하고 약간은 신파적이라는 평가를 받겠지만, 위와 같은 메시지를 위해 우직하게 밀고 나간 조성희 감독의 의지가 느껴지는 결말이었다.





새로운 장르 개척의 승리, 몇몇 배우의 연기력 논란과 스토리의 패배 사이에서 계속 얘기가 나올테지만, 어쨌든 승리호는 한국형 SF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코로나 때문에 극장에서 승리호를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총알보다 빠른 우주 쓰레기를 붙잡기 위해 다른 우주선을 제치고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는 우주선의 모습과 미래의 새로운 거주지, 그리고 지구와 우주를 잇는 새로운 운송 수단과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UTS 특공대와 승리호의 우주 전투 씬은 영화의 단점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막 SF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사람 중 한 명이기에 감동이 배가 되었다. 이래서 SF에 빠지기 시작하나, 라는 생각도 든 것은 덤이다. 승리호의 넷플릭스 개봉이 앞으로 더 많은 관객들이 SF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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