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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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하나의 RPG 게임 같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다. 일정 레벨을 달성하면 직업을 고를 수 있고, 그에 따라 다른 게임 속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시간을 더 투자하면 더 좋은 무기와 아이템을 얻을 수 있고, 그러면 다른 플레이어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다는 것도 현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같은 게임을 하는 친구들은 항상 나보다 먼저 접속해있었다. 낮이건 밤이건 상관없이 게임 속 캐릭터는 사냥터를 돌아다녔고, 시간이 지날수록 화려한 장비들과 아이템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지루해져서 게임을 그만뒀던 것이다.
인생과 게임의 차이점은 쉽게 그만둘 수 있냐에 달려있다. 게임은 허무함이나 지루함이 몰려오면 쉽게 다른 게임으로 갈아탈 수 있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죽음을 감수할 용기가 없는 나는 아직 삶이라는 복잡해 보이는 게임을 접지 못했으나, 요즘 들어 회의감은 더 자주, 그리고 더 커다란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왜 화려한 저들처럼 살지 못할까?', 혹은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뭘 했지?'라는 질문은 절망감으로 이어졌고,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던 나는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점차 만족스러운 인생, 반짝거리는 꿈, 그리고 좋은 관계들이라는 밝은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껴안으려는 내 모습 뒤로 짙은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달에 개봉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은 이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관객들을 위한 영화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만족스러운 인생, 반짝거리는 꿈, 좋은 관계'라는 세 가지 단어에 관한 고민을 픽사는 그동안 다듬어온 자신만의 언어와 유려한 그래픽으로 풀어냈다. 재즈 연주자 '조 가드너'와 2000년 동안 지구로 내려가지 못한 영혼 '22번'은 우연한 사고로 만나게 되어 각자의 고민을 해결하도록 돕는다. 그 둘은 지구로 떨어져 각자 고양이와 사고로 입원한 조의 몸으로 빙의하게 된 이후부터 '그래도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먼저, 조 가드너의 몸에 빙의한 22번. 그녀(여자 목소리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편의 상 '그녀'라 칭한다)는 오랫동안 위인들을 멘토로 삼으면서도, 그들의 '위대함'에 대한 반발 심리로 인해 지구로 내려가기 위한 통행증의 마지막 빈칸을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평범한 조 가드너의 인생을 전당에서 보고, 또 지구에 내려와서 봤던 피자, 날아오는 단풍나무의 씨앗, 푸른 하늘을 본 22번은 삶을 살아가고픈 불꽃이 자신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그녀는 중간에 조와의 갈등으로 타락한 영혼으로 변모하여 다시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돌아와 어둠 속에서 자책하게 되지만, 몰입한 영혼들의 세계로 온 조가 그녀를 구하는 데 성공하면서 22번은 마침내 지구로 떠나는 데 성공한다.
조 가드너 역시 22번의 여정을 함께하며 변화했다. 친구 데즈의 미용실에서, 그는 문득 자신이 그와 정말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인생 얘기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다. 하루 종일 재즈 이야기만 하는 조는 어떻게 보면 일방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다. 재즈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으로 듣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재능이 있는 그는 다른 종류의 언어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재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의 세계는 좁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22번을 남겨둔 채 다시 지구로 돌아온 그가 기회를 잡아 재즈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어도, 그는 내일 또 같은 연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무함에 빠진다. 도로시아가 말해줬던 '바다를 찾는 물고기' 속의 어린 물고기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22번이 삶의 불꽃을 얻게 된 이유를 물었을 때 제리가 빈정거린 것, 그리고 평생에 걸친 자기 확신과 그것의 파괴는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꿈은 이뤄도 문제고, 이루지 못해도 문제이다. 조 가드너의 경우는 이뤄서 문제였는데, 그는 꿈을 하나의 목적으로 간주하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이루지 못했다면 영원히 자신을 루저로 간주하는 삶을 살았을 테지만, 목표형 인간이었던 조는 성취가 원하는 자극에 휩쓸려 살고 있었다. 꿈은 목적이 아닌 과정에 있다는 뻔한 얘기를, 제작진은 조 가드너라는 인물을 통해 좀 더 유연한 방식으로 전달했다. 그들은 영화에서 그를 22번을 구원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로 그려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회의감으로 삶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려면, 관객들은 22번이 지구에 머물렀던 순간에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몰입하는 영혼의 세계로 가기 위해 그녀가 남겨둔 베이글, 막대 사탕, 단풍나무 씨앗을 앞에 두고 연주하는 모습은 자포자기가 아닌 깨달음이라고 보는 게 더 좋을 것이며, 애초에 삶을 포기하려 했으면 바로 '머나먼 저 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결국 조 가드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었고, 22번도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지구로 가는 데 성공했다. 이제 두 인간은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또 앞으로 찾아갈 것이다. 특히 탄생 이전에 얻었던 삶에 대한 깨달음을 지불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 22번의 험난했던 여정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상처와 방어기제의 원인이었던 위인 멘토들의 잔소리를 깡으로 버틴 22번이 새삼 대단해 보이긴 했지만, 위인들이 그녀에게 '훌륭해져야 하는 인간의 삶'이라는 관념적 사고를 끊임없이 주입하는 모습은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것과 비슷해 보여서 씁쓸하기도 했다.
꿈을 강조하는 사회와 그 안에서 꿈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많은 이들을 목표형 인간으로 탈바꿈시켰고,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만족스러운 인생, 반짝거리는 꿈, 좋은 관계' 일종의 프레임을 만들고 거기에 나를 가뒀다. 그러나 내 삶에 길바닥에 누웠을 때 보이는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이나 처음 먹는 피자의 맛, 그리고 고요한 거리에서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을 보는 순간으로 채우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것으로 후회 없는 삶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