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에 빠진 어느 남자의 이야기
인간은 자주 망상에 빠진다. 이는 상상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만약 그때 a라는 선택이 아닌 b라는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까'라는 후회와 같다. 하지만 ‘상상’은 망상과는 반대로 긍정의 명사다. 내가 어렸을 때는 주로 상상을 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모두 잘 풀릴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다른 것들이 내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히려 상상이 아닌 예상이라고 불러야 이치에 맞을 성싶었다. 각자의 현실에 맞추어 적당히 솔질을 하고 품을 들인 생각들을 사람들은 예상이라고 불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간에 위치하는 그것은 마치 중학교 과학 시간에 쓰이던 무게 저울과 비슷하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상상, 혹은 지독한 망상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주 잠깐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기도 하고, 아니면 평생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인간을 진창 같은 그곳으로 밀어 넣는 과거는 현재보다 힘이 세다. 강한 휘발성으로 인해 뿌리자마자 날아가 버리는 향수 속 알코올 같은 현재는, 그것이 다 날아가고 은은한 향기만 남은 손목의 향수 같은 과거를 절대 이기지 못한다. 다만 미래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과거에 얽매인 이들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하지 않길 바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빛나는 과거의 추억에 얽매여 늙은이가 돼서까지 사법고시를 놓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외교관으로 살아왔으나 지금은 그저 종일 맥도날드에 앉아서 신문만 보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의 과거는 결과적으로 공허한 현재와 추한 미래를 만들었다. 이는 극단적인 사례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당장 위와 같은 모습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적으로 덜 극단적인 사례를 찾으라면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사람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이크는 여자를 만났던 어느 시점으로부터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세계 모두를 망상 속에서 규정짓고, 그것에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요소는, 그러니까 여자 친구의 직업 따위의 것들과 심지어 그녀의 존재까지, 모두 현재의 늙은 제이크의 망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래전 어느 술집에서 눈길만 주고 정작 말은 걸지 않았던 어느 여자를 두고 이만큼이나 망상이 자라나도록 스스로 놔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영화 내내 펼쳐지는 그의 망상은 거대하다. 하지만 마치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 그의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아지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느 여자가 남자 친구와 함께 시골에 사는 그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그녀는 이별을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해심이 많고 대화도 잘 통하는 남자이지만, 그래도 끝끝내 부재했던 무언가는 여자에게 이별을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부모님과의 저녁 식사에서 그녀는 화가가 되기도, 심리학자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제이크의 부모님에게 보여주기도 하며 친밀감을 쌓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양친들 역시 제이크가 어렸을 적에 그림을 잘 그렸다고 말하며 어색한 분위기 속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제외한 모든 장면은 다 제이크의 망상이다. 그녀는 남자 친구 부모님의 젊었을 적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모두를 목격하는 기이한 일을 겪게 된다. 게다가 젊은 제이크 어머니의 요구로 그녀가 지하실에 내려갔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이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녀가 지하실에서 본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속에는 유니폼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화 중간에 어느 노인이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 사람들은 노인이 바로 제이크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물리학자라고 나오는데, 왜 지금은 그저 학교를 청소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이는 제이크가 여자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까지 망상에 빠져있음을 암시한다. 동경하던 화가의 작품을 따라 그리고 뮤지컬 배우, 시인에 물리학자까지, 그가 되고 싶었던 것들은 많았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노벨상을 목에 걸고 연설을 하지만, 사실 제이크는 성인 이후로 제대로 한 일이라곤 청소부 일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사실을 총동원해서 망상 속 세계를 구현했다. 어찌 보면 경이로울 정도로, 그는 이 일을 해냈다.
두 사람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집 근처에 있는 동물 농장을 보러 간다. 그리고 거기서 여자는 한때 돼지가 있었던 자리를 보게 된다. 제이크의 말에 따르면 돼지는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인해 구더기에 잡아먹혀 죽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제이크의 여자 친구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희망이라는 것을 만들어 현재를 살아가고,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 늙어버린 학교 수위 제이크 앞에 등장하여 어디론가 향하는 길을 안내하면서 자신의 패를 받아들이고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이런 돼지의 모습에서 나는 마치 카뮈의 부조리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나올 법한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너와 나, 그리고 아이디어는 모두 하나라는 대사는 아직도 아리송하다. 돼지의 마지막 조언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번 말하지만, 이 영화 속 인물의 말과 생각, 풍경과 사건은 모두 제이크의 망상 속 요소들이다. 귀갓길에 들렀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제이크와 같은 피부 두드러기를 앓는 점원은 여자에게 ‘시간 속에서, 당신은 앞으로 가지 않아도 돼요.’라고 말한다. 게다가 제이크를 쳐다보며 웃는 점원들은 여자 주인공에게 ‘둘이 똑같네.’라고도 말한다. 영화 시작부터 여자의 생각을 제이크가 독심술이라도 사용해 모두 파악하고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이나 기이하게 흐르는 시간 속 풍경들, 그리고 미래로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는 말을 하는 아이스크림 가게 점원까지. 이것들은 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제이크의 머릿속 작품이다.
게다가 모두 현재의 늙어버린 제이크가 일하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이미지를 따와서 자신의 망상 속의 또 다른 인물을 창조하는 데 사용한 제이크는, 그들을 보며 미처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생각들을 망상 속 인물을 통해 뱉어내고 있다. 이런 이미지 차용의 방식은 영화 막바지에 나오는 발레 씬에서도 사용된다. 그는 그녀와 함께 만들어갔을 수도 있었던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을 춤이라는 형식으로 선보였다. 거기서 늙고 추한 자신의 모습과는 달리, 남자 무용수의 모습은 젊고 활력 있는 움직임으로 춤을 추고 있다. 사실 그 무용수의 이미지마저 언젠가 학교 복도에서 연습하던 두 남녀의 얼굴을 기억해두었다가 자신의 망상에 넣은 것이지만. 결국 작은 발레 공연은 남자 무용수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아마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상상 속 장면들처럼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제이크의 욕망이 간접적으로 드러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밤새 내린 눈으로 인해 뒤덮인 두 사람의 차를 보여주며 끝난다. 이쯤에서 제이크의 행방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돼지의 유령을 따라간 것으로 보아 자살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는 영화의 시작부터 던졌던 질문에 드디어 답을 했다. ‘두려움은 점점 커져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 절망스러운 현실로부터 비롯되는 망상은 지독한 악순환의 원인이 되었고, 필연적으로 정답을 알았던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 속에서 그것을 충실히 이행했다. 과연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삶과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설명할 때 사용한 비유처럼, 제이크라는 인간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이 정해지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세상에 던져진 대자 존재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는 탄생과 동시에 주어지는 자유,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른 불안과 책임은 모두 제이크의 몫이다. 영화 말미에 그는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망상으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던 평생의 삶과 뒤따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래서 남들은 제이크의 일생이 끔찍하고 소름 돋는다고 느낄지언정 그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