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관 Apr 14. 2021

주인과 하인의 법칙, 그리고 시스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화이트 타이거'를 보고 쓰다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한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느 정도의 희생물을 담보로 언제든지 자신이 속한 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을 예로 들자면, 기초 교육을 받을 때에는 대학을 가는 것이, 대학을 다닐 때에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이, 그리고 취직 이후에는 가정을 꾸리는 것이 보편적이고도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런 '헬조선'을 캐나다와 비교하며 이민의 꿈을 꾸기도 한다. 



물론 이런 상상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평생 한국인일 수밖에 없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국 사회의 일원이도록 하는 법칙과 마인드가 내재하고 있기에 쉽게 그것을 거스를 용기를 내지 못할 뿐더러 엄두도 내지 못한다. 마치 부처님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도망쳐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에서 한 발자국도 도망갈 수 없었다는 어느 원숭이의 일화처럼. 그리고 우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마치 사회라는 거대한 손바닥에서 바둥거리는 한 마리의 작은 일개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종종 들기 마련이니까. 당장 나를 부릴 좀 더 큰 개미 집단을 거스르기에도 벅찬데, 시스템을 구성하는 법칙을 어떻게 거스를 생각을 할까.



오늘 소개할 영화에서도 자신의 종들을 부리는 어느 커다란 개미로부터, 그리고 그들을 포함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작은 일개미와 같은 인간이 있다. 영화의 주인공 '발람'은 인도의 어느 시골 구석에서 대가족과 사는 남자다. 그의 가족은 작은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데도, 가난한 형편 탓에 발람은 학교를 그만두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약하고 나이 많은 마을의 지주가 미국에서 공부한 자신의 아들에게 일을 맡기게 된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신에게 맹세하면서까지 할머니에게 돈을 받아 도시로 가서 운전 면허를 취득한 발람은, 지주의 아들 '아쇽'의 운전기사로 취직하여 일을 하기 시작한다. 깨끗한 유니폼과 그가 일하게 될 넓고 고급스러운 저택은 시궁창 같았던 지난날의 기억과 뒤섞여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이란 기대감을 발람에게 잔뜩 불어 넣어주었다.



게다가 지주와 그의 장남과 달리 발람의 새 주인이자 차남 '아쇽'은 미국에서 공부한 엘리트답게 합리적이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낮은 카스트를 지닌 하인에게도 '주인님'이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라고 하거나, 같이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며 스스럼없이 지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술에 취해 발람 대신 운전대를 잡은 아내 핑키가 뺑소니를 내자 (비록 나중에 뇌물로 무혐의를 받아내긴 하지만), 그들은 발람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렇게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이제는 일마저 다시 앗아가려는 아쇽에게서 발람은 처음의 친절하고 합리적이었던 미국 대학 출신 엘리트 대신,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도인의 모습을 본다. 결국 발람은 어느 도로 위에서 그를 죽이고 강탈한 돈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마침내 그가 원하던 부자가 된다. 하지만, 그는 과연 닭장에서 탈출한 셈일까?



영화 초반 내레이션으로 나온 '주인과 하인의 법칙'은 발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사업을 일으킨 이후, 그는 우연히 신문에서 일가족 17명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읽게 된다. 주인의 가족을 해치거나 재산을 훔치면, 하인의 가족도 보복당한다는 인도의 주인과 하인 법칙은 발람을 비껴가지 않았다. 맞다. 인도에서 원래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인생을 살기 위해 그가 담보로 내건 것은 바로 발람 자신의 가족들이었다. 허나 영화 내내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는 발람의 발목을 고리타분한 이유를 들어 잡는 사람들은 오히려 가족들이었다. 



닭장 같은 집 안에 빼곡히 들어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자야만 하는 시궁창이 싫어 발람은 보복을 각오하고 그곳을 영영 떠났던 것이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나는 도덕적인 판단과 헤어나오기 쉽지 않은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저울질하기에는 그의 현실이 너무도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발람의 운명을 암시하는 단어이자 한 세대에 하나만 태어난다는 뛰어난 인재를 가리키는 '화이트 타이거'. 하지만 발람은 좀 다른 의미의 백호가 되어 자신이 갇혀있던 우리를 뛰쳐나오게 되었다. 뛰쳐나온 바로 그곳이 또 다른 우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사실 아주 예전부터 아쇽 가족의 하인으로 일한 발람은 그들이 유명한 정치인들과 경찰에게 뇌물을 건네며 지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봐왔다. 그래서 아무리 인도가 선거로 대통령과 정치인을 뽑는 민주주의 국가가일지라도, 동시에 카스트라는 인도 특유의 신분 체계는 아직도 인도 사람들 안에 남아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발람은 알았다. 모든 것을 가진 소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자신 같은 약자가 암묵적인 룰을 깨고 성공을 거머쥔다? 그에게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쇽의 죽음 이후 발람의 성공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운전기사를 고용하여 택시 회사를 운영하고, 만약 그가 실수로 사람을 치면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모든 것을 보상해주는 발람의 모습은 분명 발람이 느끼고 경험했던 인도에서는 찾기 힘든 장면이다.



인도를 방문하는 중국 총리를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돈을 찔러 넣는 장면이나 회사에서 직원을 대하는 방법,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을 채용하고 모든 피해의 책임을 자신의 모습으로 돌리는 장면은 하인 시절의 발람이 아쇽에게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데다가,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이름인 '발람'을 버리고 '아쇽'이 되어 그토록 원했던 주인의 삶을 산다. 발람은 닭장 속의 더러운 닭에서 벗어나 한 세대에 한 번씩 태어난다는 '화이트 타이거'가 되어 한 때 자신의 고향이었던 닭장과 지금의 넓은 우리를 비교하며 '고귀한' 자신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역시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버둥거리는 개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듯하다. 또, 혹시 모른다. 자신의 성공을 팔 벌려 자랑하는 그의 뒤로 보이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수많은 기사들 중 누가 그의 가슴에 칼을 꽂을지.





나는 물론 인도 사람도 아닐 뿐더러 인도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그저 매 끼마다 마살라 대신 고춧가루를 잔뜩 뿌린 김치를 먹는 한국 사람이다. 그래도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할 어떤 사회를 헤쳐나가는 인간으로서 한 번이라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어떤 벽에 가로막히는 순간에 드는 막막함을, 나나 발람이나 똑같이 느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어질 수 있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인류의 오랜 갈망과 거미줄 같이 빼곡하게 들어찬 사회의 온갖 룰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부조리는 힘 없는 개인에게 선택을 재촉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바라지 않는 하나의 정해진 정답을 골라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처음 보고 나서 느꼈던 '불편하고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마주하고 싶지 않고 인정하기도 싫지만, 결국 똑바로 바라봐야만 하는 사람들은 이 블랙 코미디에서 각자가 속해있는 사회의 민낯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십걸 + 할리퀸 + 오만과 편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