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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국일기 Jun 02. 2024

마침내 떠나는 날

교육청을 잘 만난 덕인지 유학휴직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사실 내겐 매 순간순간이 위기였다. 원체 걱정이 많은지라 그 많은 돈을 들여 나 유학 간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다 냈는데 혹여나 일이 틀어질까 노심초사 했고, 기다림의 연속이였으며 기간 문제로 잠시 동안이지만 골머리를 썩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내게 휴직 결정이 났느냐며 안부를 물어 오셨지만 떠나기 한 달 전에 확정이 되었기에 그간 나는 아직 모른다, 여태 준비 중이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어 꽤나 멋쩍었다. 휴직 사실을 쉬쉬 할 수도 없고 말이다.


영국 학생 비자는 크게 장기로 나뉜다. 장기는 1년 이상, 그러니까 현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경우이다. 나의 경우 단기였고 단기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머무는 기간에 따라 6개월11개월로 나뉜다. 나는 1년 휴직을 해야 했으므로 11개월 비자를 신쳥해야 했는데 그러면 6개월보다 비자 발급 과정이 좀 더 복잡해진다. 덕분에(?) 연가를 두 번이나 써야 했고 그 날은 다른 선생님들이 대신 우리 반을 맡아야 했다.

감사히도 선생님께서는 하나같이 나의 선택이 멋지다며 응원해주셨다! 사실 학위 취득도 아니고 돈만 내면 갈 수 있는 어학원이였기에 놀라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나는 멋쩍었다. 또 뿌듯했다. 뭐야 나 좀 멋진 일을 하는건가?


오직 부모님만이 나의 선택이 영 못마땅 했다. 엄마는 결혼할 준비는 안 하고 무슨 또 엉뚱한 일을 저지르냐며 혀를 내둘렀고 아빠는 그저 걱정이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룰루랄라였다. 사실 실감이 가지 않았다. 내가 외국에 가서 지내는 건 내 오랜 꿈이였고, 그래서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들 걱정이 되지 않냐고 물어도 집밥을 좋아해서 그것뿐이 걱정이 없었다. 

물론 아플까봐 그것도 걱정이였다. 그런데 가뜩이나 걱정하는 엄마한테 그걸 말할 순 없었기에 그냥 나는 남은 방학 동안 열심히 운동을 하고 밥을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동생과 언니는 방학 시즌에만 집에 오고 아빠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더 많기에 우리 집 지킴이는 단연 나와 엄마였다. 나는 그렇게 살가운 딸은 아니다. 그냥 엄마가 해주는 밥 잘 먹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

그래서 엄마를 외롭게 한다는 생각은 딱히 안 했는데 언제부턴가 엄마가 나 가면 이제 심심해서 어쩌냐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시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그저 농담인줄로만 알았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주변 사람들을 만나며 걱정보단 설렘이라며 아주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원래  여행은 떠나기 전이 더 설레는 법이라며.. 별로 슬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1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한 점이 큰 것 같다.


마침내 집을 나서는 날 마지막으로 엄마를 포옹했는데 엄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셨다. 엄마는 두 딸보다도 남동생을 끔찍이 여기는 타입이셨고 그런 막내가 군대갈 때도 크게 동요하지 않으셨는데(오히려 너는 군대에 있어야 건강해진다며 더 있다 오라고 했다..) 또 결코 우는 법도 없으신 울 엄마가 왜 이러시지? 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엄마가 나한테 우리 딸 사랑한다고 하시는데 나는 나도 사랑해라는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하고 차에 타서 엉엉 울었다. 그 때 처음으로 유학 가는게 맞는건가 생각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가는 게 맞는거라고 200퍼센트 확신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여튼 자식이란 죽을 때까지 부모 걱정 시키는 존재다.

그 이후로는 눈물이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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