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다지 '신사적'이지 않았다.
오래 전 우연히 영국사람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내가 미국인으로 잘못 기억했더니
"그럼 넌 중국인이야?"라며 굉장히 비아냥거렸기 때문이다.
실수라며 진심으로 사과까지 했건만 곧바로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대꾸한 것이 꽤 임팩트있게 기억에 남았다.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비행기 안은 한국인으로 가득해서 외국에 간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는데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나는 그야말로 '멜팅팟'의 현장에 있음을 실감했다.
수화물을 찾는 곳으로 나가자 나랑 같이 온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 한명 코빼기 보이지 않았다. 백인이 많은 것도 아니였다. 정말 전세계에서 온 인종의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특히 흑인, 인도계가 다수를 차지했다. 아무래도 유럽내 노선보다는 다른 대륙에서 오는 비행편이 많은 게 이유인 듯 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외국인의 비율이 3% 가량. 반면 영국, 특히 런던은 외려 영국인 만나기가 어렵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이민자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간다.
그 동안 내가 살던 세계는 당연히 한국 사람이 다수이고 한국인이 주류였는데, 그래서 그것을 인식할 필요조차 없었는데, 여기서 나는 과연 소수 중의 소수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올 줄 모르는 나의 수화물 짐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백인 할아버지가 가이드라인을 넘기고 서 있는 나를 보고는 좀 나오라며 인상을 팍 쓰며 손짓했다. 나는 무서웠다. 여기선 어떤 사회적 룰이 작용하는지 몰랐기에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똑같이 나처럼 라인을 넘기고 서 있는 또 다른 백인 할아버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나를 외국인이라 무시하는걸까 싶어 기분이 나빴다. 이것이 인종차별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회의 소수가 되면 작은 차별도 크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그리고선 곧바로 또 한번 영국에 실망하게 된 해프닝.
힘겹게 기숙사에 도착한 나는 제발 좀 씻고 싶었지만 드라이기를 살 수 있는데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좀 빌렸으면 했지만 어째 사람보다 돌아다니는 새가 더 많은 주말 오전이였다. 그 때 내 레이더망에 기숙사 앞 흡연존에서 담배를 피우는 소녀가 걸려들었다.
영국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스타일(왜 있잖은가 그 스킨스에 나올 거 같은..)을 한 그녀에게 접근했다.
“미안한데 너 여기 학생이야?”
“그런데?”
“응 나도 바로 여기 사는 학생인데 내가 인제 와서 그러는데 혹시 드라이기 좀 빌릴 수 있을까?”
“아.. 근데 내가 담배를 좀 마저 피워도 될까?”
“응! 내가 너 다 핀 것 같으면 다시 밖으로 나올게!”
이어지는 눈치 싸움.
그렇게 요리를 하며 창 밖을 보는데..
없다.
그녀가 사라졌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
이 외에 우리 동네 불량아 무리가 나에게 칭챙총이라고 한 것, 아일랜드에서 니하오 소리를 딱 한번 들은 적이 있긴 한데 이를 제외하면 난 솔직히 인종차별이랄 것을 딱히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환경이 다국적 사람들이 지내는 어학원이라는 것, 또 내가 진정한 영국 사회에 섞여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진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꼭 니하오, 칭챙총 소릴 들어야 인종차별을 당한 것은 아니다. 외국인, '유색' 인종이라서 불편감을 느꼈다면 모두 차별의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건 있다. 아무래도 가까운 인종끼리 어울려 지내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건데 한국에서는 한국이랑 천지차이인 일본이지만 시크하고 자유분방한 유럽 애들 틈바구니에 끼면 일본 친구들에게 그렇게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마찬가지의 이유로 유럽애들도 그들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인종차별이라기보단 나와 너무 다름에서 오는 괴리랄까.
그런데 또 막상 이 유럽 친구들이 영국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때면 묘한 무시랄까 기분 나쁜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어린 게 문제일수도!
사실 내가 겪은 영국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스했다. 솔직히 신사의 나라 따위의 말, 믿지 않았는데 길을 가다 뭔가 물어보거나 하면 백이면 백 친절하게 답변해주고 짐을 들어준다든지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도와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또한 외국인이 흔하진 않은 작은 동네에서 살았음에도 나는 단 한번 이방인을 신기하게 쳐다본다는 등의 느낌을 받은 적도 없고 위협을 느낀 적은 더더욱 없다. 차라리 내가 외국인인걸 좀 감안해줬음 하는데 말을 여전히 너무 빨리 해서 알아먹기 힘들었다는 거..
한번은 길거리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무뚝뚝한 얼굴에 처음엔 지레 겁먹었지만 막상 말을 거니 성심성의껏 답변해줘 영국이 더 좋아져 버리고 말았다.
특히나 노인 분들이 참 인자하고 따듯했던 기억이 있다. 좁은 길을 지나갈 때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지나가라고 기다려준다거나 나이 어린 학생들도 문 잡아주는 매너를 보일 때면 오 여기가 과연 영국이구나 싶긴 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나의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고 자신의 발음을 놀리듯이 따라하는 직원을 만났다거나 동양인 여자라고 만만하게 대하는 남자들에게 질려버렸다는 등 지인의 얘기를 들으면 같은 영국 내에서도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 개개인마다 차별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일을 두고 느끼는 바도 다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