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0 모스크바#6
으아 벌써 마지막 날이다. 어쨋든 수요일이라 나 말고는 투숙객 모두 출근을 해야 한다. 다같이 모여서 마지막 아침식사를 함께 한 뒤 눈물을 훔치며 작별인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려는데 마침 Y형님이 회사 근처에 있다는 군사 박물관에 데려다 준다고 했다. 밥만 먹고 다시 자려고 했는데 오늘도 붙잡혀 버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택시를 타고 빌딩이 잔뜩 있는 동네로 나왔다. 까맣게 턱수염을 기른 택시기사 아저씨는 이말년 만화에 나오는 표정으로 화려하게 운전을 해 주셨다. 덕분에 잠이 퍼뜩 깼다. 가는 동안 Y형님은 네이티브 수준의 러시아어로 택시 기사분과 껄껄 거리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 유창하게 외국어를 하는 모습은 어찌 그리 멋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내가 못 하니까 그런 것 같다. 아무튼 넋놓고 있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무튼 같은 건물에 스타벅스가 있어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왔다. 러시아에 스타벅스가 들어온지는 얼마 안 된댔는데 벌써 어디를 가도 스타벅스가 있다. 서구 열강의 잠식력이 어마어마하다. 아무튼 이 동네에서는 물 탄 에스프레소를 '러시아노'라 부른다고 인터넷에서 봤던 것 같은데 어쨋든 이 곳 스타벅스 메뉴판에는 대놓고 아메리카노 (Американо) 라고 씌여 있다. 이게 커피 한 잔 가격도 만만찮은지라 평범한 사람들은 잘 안 보이고 약간 신세대 느낌의 분들이 종종 있다.
사무실에 잠시 들러서 직원 분들과 인사를 나눈 뒤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Y형님은 회사에서 지금 하는 일과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이 머나먼 북쪽 나라 일상의 구석에 한국 기업이 이렇게 깊이 박혀있다는게 굉장히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이 동네에 몇 년 정도 와서 살면 꽤 재밌겠다.
다른 직원분께서 새 차를 샀다며 군사 박물관까지 태워주신다고 했다. 으흐흐 프랑스 차는 처음 타 본다. 요즘 차들은 인테리어가 대단히 예쁘다. 차를 타고 오분 정도 가고 나니 전쟁 기념관이 나타났다. 여기서 Y형님과 작별을 했다. 기약 없는 작별은 항상 슬프지만 인생이 다 그런게 아닌가. 아무튼 박물관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철모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걸 보니 뭔가 심상찮다.
입장료를 내면서 카메라를 보여주면서 뽀또(фото) 되냐고 물어봤더니 돈을 조금 더 받고 들여보내 줬다. 크 역시 자본주의 국가답다.
박물관에 들어가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바로 앞에 나 있다. 여길 따라 올라가면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2차대전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야말로 인류 최악의 전쟁이다. 2차대전, 특히 독-소 전쟁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희생자를 내고 결국엔 소련이 승리했던 말도 안되는 전쟁이었는데, 한맺힌 승리의 핏자국이 박물관 구석구석에 묻어있었다. 정말로 거대한 한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 1층
1층에는 좀더 옛날의 것들이 전시돼 있다. 그러고보니 중세에 이 동네가 어땠을 지 전혀 아는게 없다. 어 근데 복장이 어느정도 익숙한 것 같은데 가만 생가해 보니 어렸을 적에 본 '바보 이반'같은 동화책에 삽화로 나오는 장면 같다. 자꾸 보다보면 북방 아시아 민족 느낌도 조금 있는 것 같다.
얼추 다 본 것 같다. 바깥에도 뭐가 있길래 나와보니 다양한 무기가 전시돼 있다. 그래도 모니노에 갔던 걸 후회하지는 말아야겠다. 아무래도 도심이다보니 그정도까지 미친 스케일은 아니었다.
이제 근처에서 지하철역을 찾은 뒤 민박으로 돌아가면 된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길래 가보니 열기구를 띄우고 있다. 오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는데! 잔뜩 신이 나서 구경하려는데 뜨는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민박으로 돌아왔다. 올 때는 배낭 하나였는데 짐을 하나둘 주섬주섬 챙기고 나니 혼신의 힘을 다해 압축했는데도 쇼핑백이 둘이나 추가됐다. 투숙객들은 모두 출근했고 텅 비어있는 방에서 나와 주방장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린 뒤 슬슬 숙소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보니 이 동네는 공사를 할 때 천막에 지어질 건물의 미리보기를 그려놓는다. 이게 은근히 귀여워서 공사장을 지나갈 때마다 피식하게 된다.
세상에 다시 공항으로 왔다. 탑승권을 발권하고 나니 시간 계산을 잘못 한 것 같다. 아오 여기서 6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공항에서 담배나 피우며 좀 쉬어야겠다. 하지만 출국수속을 마치고 나서 이곳이 금연 시범 공항이라는 것을 꺠달았다. 세상에 14시간을 담배없이 버텨야 하나? 나중에 알았는데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리면 벌금이 만원밖에 안 한다고 한다. 어쩐지 화장실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던 것 같다. 왠지 피곤해서 의자에 앉아서 눈을 좀 붙이고 나니 그래도 네시간정도 남은 것 같다.
정말 기나긴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이륙을 한다. 으아아! 이제 진짜로 작별이다.
그러나 그냥 잘 수 없다. 어차피 시베리아 벌판 위로 날아간다면 일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계산해 보니 얼추 5시간쯤 뒤면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어폰 알람을 맞춰놓고 맥주를 쭈욱 들이키고 나니 잠이 들어버렸다. 알람소리에 눈을 떠 보니 지평선이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정말 감동적인 일출이었다.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바로 출근해야 하는 가슴아픈 일출이지만 뽀송뽀송한 구름 위를 신나게 날아서 정겨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슬라이딩한 뒤 입국심사대를 지나니 뭔가 꿈에서 깬 기분이다. 생각해보면 모스크바에 머무른건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옆에 한국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공항버스를 타고 바로 회사로 향하는 길에 다시 잠이 들었다. 아마 눈을 뜨고 나면 다시 직장인의 일상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