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19, 이탈리아#1
어렸을 적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디스켓 몇장에 이것저것 프로그램을 넣어놓고 다녔다. 그러다가 학교나 컴퓨터가 있는 친구 집에 놀러가면 그 것들을 가지고 놀았다. 그 중 하나가 저 타자연습이었는데 거기 내장된 게임 이름이 '베네치아'였다. 이 녀석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지만 그 대신에 PC 스피커를 우렁차게 울려댔다. 떨어지는 단어를 하나씩 놓칠 때마다 벽돌이 깨지고 벽돌이 다 깨지면 탑이 무너지는데 그 때 탑이 무너지는 광경이 PC스피커로 울려댔다. 이놈은 볼륨 조절도 안되는데 그것도 친구 집에서 우렁차게 울려대던 '솔도 솔도 솔도' 소리가, 아무튼 그 장면에 울려대던 지랄맞은 소리가 트라우마가 되어서 아직도 가끔 환청이 들린다.
그러다가 몇년 지난 1996년 즈음, 드디어 우리집에도 컴퓨터가 생겼다. 이 때에도 PC스피커는 달려 있었지만 애드립이라고 아무튼 선으로 연결한 외장 스피커에서 꾀꼬리같은 우아한 소리가 나던 시절이었다.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엄마 몰래 새벽까지 게임을 했다. 이 때 가장 빠져들었던 것은 '대항해시대2'라는 게임이었다. 여기서도 문제의 그 도시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리그릇이 특산물인 그 동네는 들어서자마자 '솔도 솔도 솔도' 거리는 환청이 울려퍼지며 바이러스 군단이 쏟아져 내렸다. 아! 물의 도시! 이 곳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물의 도시'라고 했을까? 그 때 머릿속에 뭔가 제대로 각인이 되었는지 나중에 돈을 벌게 되면 이 동네에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놓고도 항상 먼 미래의 일이라 생각하고 그냥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이를 먹었고 나에게도 월급이란게 생겼다. 그러고보니 다음달이면 마침 추석도 오겠다, 지금쯤이면 떠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행기표 검색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탈리아를 검색하니 밀라노가 제일 싸다고 뜬다. 파리에 한 시간 들렀다가 가는 노선이다. 사실 더 고민할 게 없다. 인생에서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해 봤지만 이런 건 10분 이상 고민해봤자 전혀 득될 것이 없다. 혹시 모르니 밀라노 공항 근처의 한인 민박을 검색해서 하루 예약을 잡았다. 숙소는 사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최저가로 클릭하면 된다. 모두 합쳐 30분 컷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죽음의 산업전선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미친듯이 흘러흘러 잊고 있었던 그 날은 기어이 또 와 버리고 말았다. 일단 인터넷으로 비행기 좌석을 고를 수 있나보다. 나는 항상 창가에 앉으니 앞이냐 뒤냐가 중요한데 이번에는 의자가 적게 있는 꼬랑지 쪽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꼬랑지 좌석들은 그림상으로는 벽에 촥 붙어있지만 왠지 실제로는 일렬로 붙어있을 것 같아서 50L이 제일 널널할 것 같다. 일단 지르고 보자! 빨리 찍을수록 이득이다. 아이고 술을 마시다보니 벌써 아침이다. 밤새 잔뜩 퍼마신 술이 깨지도 않은 채로 가방에 티셔츠 두 장과 카메라를 쑤셔넣었다. 여기서 뭘 더 가져가야 할 지 모르겠어서 빈 스케치북도 하나 챙겼다. 아오 그렇게 해도 가방에 여유가 있다. 뭔가 꺼림직하지만 일단 가보자.
아무튼 인천공항으로 왔다! 비록 경유지만 파리행이라니 엄청나게 떨린다. 지도상으로는 모스크바랑 별로 거리 차이는 없어보이는데 아무튼 4시간 이상 더 걸려서 12시간 반 걸린다. 한 시간 쉬었다가 밀라노행으로 갈아타고 두시간 더 가야 한다. 열다섯시간이라니! 하지만 비행 전 날 술을 잔뜩 퍼마신 채 밤을 새고 나면 비행기는 타임머신으로 변신한다.
수속을 마치고 곧바로 탑승했다. 역시 딱 맞춰서 타는 스릴이 있다. 이번 비행기는 에어프랑스 267편, 지난번과 같은 보잉 777 기종이다. 아무튼 문에 써있던 프랑스어 두 단어 Ouvrir, Sortie를 열심히 외우면서 자리에 앉았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탈리아로 가는 놈이 왜 이걸 외우고 있는건가? 아무래도 술이 덜 깬 모양이다.
오 좌석 예약은 성공적이었다. 의자 오른쪽에 가방이 들어갈 공간이 있어서 좋았는데 심지어 의자 앞 공간도 다른 좌석보다 조금 더 넓어서 완전 꿀이었다. 이번 여행은 왠지 예감이 좋다.
그냥 최저가로 검색했던 표지만 에어프랑스라니 이름만 들어도 왠지 고급져 보인다. 자리에 앉고 안전벨트를 메고 나니 기내 안전 비디오를 틀어줬다. 여차해서는 보지도 않고 넘어갈텐데 이 영상은 처음 켜자마자 시선을 다른 곳으로 아예 돌리질 못하게 막아버린다. 세상에 이걸 이렇게 만들 수가 있다니 아직 이륙도 안 했는데 벌써 감동이 밀려온다. 와 무슨 안전 비디오를 보면서 감동을 하고 앉아 있냐, 아무튼 다음에는 프랑스에 가 봐야겠다.
창밖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신기한 비행기가 보이길래 자세히 보니 박지성 선수의 사진이 새겨져 있다. 에어아시아 편인 것 같은데 와 이분들 마케팅이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외국 항공사의 비행기에 얼굴이 새겨진 박지성 선수도 대단하다.
아무튼 비행기는 이륙을 한다. 승무원 분이 너무 잘생기셔서 계속 쳐다보게 된다. 어버버하고 있는 사이에 식사 메뉴를 주는데 메뉴 보소.. 사람들이 음식 얘기를 하면 괜히 프랑스가 튀어나오는게 아닌가보다. 비행기에서 기내식 메뉴를 받고 계속 이렇게 심장을 움켜쥐고 있으니 뉴비인게 너무 티가 난다.
아무튼 엄청 취하고 졸린 상태인지라 잠은 자야겠는데 음식 냄새가 자꾸 나를 깨운다. 프랑스는 역시 포도주인가 하며 계속 포도주를 마셔댔더니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보잉 777 타임머신은 드디어 프랑스 빠리! 샤를 드 골 공항에 착륙했다. 태어나서 처음 밟는 프랑스 땅! 을 느낄 새도 없이 다른 터미널로 이동해야 한다. 근데 이게 거리가 꽤 멀어 보인다. 환승 시간은 한시간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당연히 여유로울 줄 알았다. 근데 생각해보니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모두 유럽연합에 속해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여기서 입국심사를 하고 국내선으로 환승해서 가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터미널도 달라서 옮겨 가려면 공항 버스도 타야 했다. 와오 씨 이 공항은 왜 이렇게 넓냐 죽어라고 미친듯이 뛰었다. 그나마 다행이도 한국과 일본은 입국 심사 입구가 따로 떼어져 있고 게다가 자동 출입국 심사도 가능했다. 그래도 역부족인 듯 30분동안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결국 매정한 시계는 보딩 타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비행기를 놓치는건가 으아아아 눈 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그냥 죽어라고 뛰고 있었으나 단지 바닥 청소가 너무 잘 돼 있었다. 왼 발이 물자국을 따라 쭈욱 미끄러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착지를 했지만 바지에서
뿎
하는 소리가 났다. 시발 안돼 바지는 이거 하나뿐인데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설마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가랑이가 한 10센치정도 찢어진 것 같다. 아뿔싸 그러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 엉덩이로 바지를 움켜쥔 채 계속 뛰었다.
근데 가면서 느낀 건데 이 동네 비행기들은 죄다 늦는건지 심지어 다른 게이트들도 이륙시간이 지났는데도 종종 열려 있다. 손으로 심장을, 엉덩이로 바지를 붙잡은 채로 미친듯이 뛰다가 결국 우리 게이트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내 비행기도 이륙 시간이 지나서야 슬슬 개표를 시작했다. 게이트에 Have a nice trip 이라고 써 있는게 마치 한 손으로 코를 훔치며 날 보고 윙크하는 것 같다. 순간 눈물이 흘렀다. 알 이탈리아..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결국 비행기에 탔다! 세상에 이럴수가 내가 입고 온 셔츠에 작은 옷핀이 달려있다. 정말 세상이 이렇게 로또맞은 적이 없다. 아무튼 화장실에 가서 옷핀으로 바짓가랑이를 일단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청색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정도면 허전한 것만 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비행시간도 짧은데다가 아까 하도 쳐잤기 때문에 잠도 잘 안와서 광고 책자를 보는데 열자마자 키높이 신발 광고가 나온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키가 작은 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보고 나니 뭔가 슬프다. 근데 그래도 다른 승객들을 보아하니 다들 나보다는 큰 것 같아서 더 슬프다.
유럽!! 유우럽! 뭔가 암스트롱이 달에 내릴 때처럼 사뿐히 뛰어내렸다. 14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드디어 밀라노 리나테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로밍하기에는 돈이 아까우니 심카드를 사 보기로 했다. 10기가면 충분할 것 같아서 일단 지르고 장착했다. 민박 주인 아주머니께 카톡을 해 보니 버스 번호를 알려주셨다.
아니 전차라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다. 근데 이게 아무리 봐도 신기하고 이상하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안 쓰는데 여기서는 쓰는건가?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모르겠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루이스-모그리지 명제"가 뜬다. 길을 아무리 넓혀봤자 사람들이 차를 끌고 나와서 어차피 다시 막힌다는 얘기라는데 뭔가 어이없는 것 같다가도 옛날에 심시티같은걸 할 때를 떠올려보니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저렇게 전차를 돌려서 길막을 시켜버리면 사람들이 빡쳐서 대중교통을 쓰게 된다는 얘기인 것 같다. 순식간에 납득이 되었다. 감탄을 하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서 숙소까지는 한 20분정도 걸어야 한다. 걷다보니 집이나 상가나 모두 중후한 느낌이 든다. 역사가 오랜 도시 느낌이 났다. 스믈스믈 걸어서 숙소에 도착해서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짐을 풀고 나니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이제 뭘 할까! 지도를 검색해보니 밀라노 대성당이 근처에 있는 것 같다. 한번 구경이나 다녀와 보기로 했다.
오 여기서는 구글이나 애플 지도에서 검색하면 지하철 노선이 나온다. 앞으로 길 찾는 것은 문제 없다. 아무튼 다시 아까 버스 내린 곳까지 걸어가면 손드리오 역이 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표를 뽑았다. 지하철 요금은 1.5유로라니 약간 비싼 것 같다.
근데 뭔가 심상찮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사람이 없이 썰렁하다. 이 시각에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가 없는데 뭔가 잘못된게 아닌가? 근데 어차피 아무리 잘못돼봤자 걸어서 40분이면 돌아갈 수 있다. 문득 몇년 전 서울에서 지하철 역에 갇혔던 악몽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에라이 쓸데없이 쫄지 말고 다섯 정거장만 가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칸마다 두세명씩은 있으니 겁먹을 것 없다.
아무튼 두오모 역에 도착했다. 맞은편 열차에는 그나마 사람이 있는걸 보니 잘못된건 아닌가보다.
아무튼 출구가 보이니 서둘러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어차피 스케치북도 챙겨왔겠다 첫 여행스케치로 밀라노 대성당이나 그려봐야겠다 생각하며 계단을 한 칸 한칸 올라가는데 으악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면서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치 슈퍼 그랑죠 등장신처럼 대지에서 거대한 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행 스케치로 저걸 그린다니 이건 미친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까마득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니 그보다도 그리는건 둘째치고 저걸 어떻게 만들었단 말인가. 아무튼 일단 그런건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하철에 사람이 없었던건 이미 모두 여기에 와서 그런건지 사람이 사방팔방에 좌악 깔려있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건물인가? 저것만 쳐다보고 멍하니 있었더니 순식간에 해가 져 버렸다.
아니 이게 벽돌을 세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더니 아무 생각없이 기력이 쭉쭉 빠져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마어마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뿔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증샷을 남겨야겠다. 지나가던 분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한장 남겼다.
흑흑 나중에 숙소에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초점이 안 맞았다. 내 카메라는 초점 맞추기가 까다로우니 다음부터 인증샷을 찍을 때는 휴대폰으로 부탁해야겠다.
아직 어디로 갈지도 안 정했기 떄문에 앞으로 뭘 보게 될 지 모르겠지만 이 여행의 처음은 밀라노 대성당이 화려하게 장식했다. 아마 마지막 또한 여기가 될 것 같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기념품의 유혹이 나를 감쌌지만 그런건 돌아갈 때 생각하기로 했다. 아오 벌써 여덟시 반이다! 첫날인데 후딱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도 저 거대한 건물이 남긴 전율이 가시지 않는다. 피곤하지만 그래도 이 감동이 사그라들기 전에 기록을 남겨두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여행지에서 이렇게 낙서를 해 보는 건 처음이다. 아무튼 처음이라 너무 무리했는지 다 그리고 나니 피로가 몰려와서 그대로 뻗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