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0, 이탈리아#2
다행히 아침 일찍 일어났다. 민박 아주머니께 여쭤보니 숙소에서 걸어서 15분정도 가면 기차역이 있다고 하셨다. 인터넷이고 뭐고 찾아보기 귀찮기도 하고 당장 찢어진 바지도 있으니 일단 역에 가서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표를 끊기로 했다. 왠지 역전 시장 같은게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고보니 이동네에서는 핸드폰에 깔려 있는 기본 지도 앱이 굉장히 잘 작동한다. train station을 검색했더니 밀라노 첸트랄레라는 곳이 뜬다. 스믈스믈 걸어가봐야겠다.
걷다보니 멀리서 뭔가 파란 스크린 같은게 있어서 가까이 가 봤더니 정말 블루스크린이었다. 블루스퀘어를 떠올리게 할 삼성의 마케팅인가 잠깐 생각해봤지만 그런건 아니고 냥 망한 것 같다. 아무튼 머나먼 곳에서 이런 걸 발견하니 묘하게 반갑다.
한 십분 걸으니 지도상으로 밀라노 첸트랄레라고 찍혀있는 곳에 도착했다.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거대한 역 건물어 서 있었다. 걸으면서 첸트랄레가 '역'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고 왠지 영어의 센터와 비스무리한 뜻인가보다.
아무튼 나는 급하다! 찢어진 바지를 움켜쥐고 있던 대둔근도 이제 한계에 다다라 부들부들 떨린다. 역 광장으로 호다닥 뛰어들어와서 드디어 청바지를 샀다. 40유로면 적당한 가격인가? 아무튼 물가를 모르니 그냥 샀다. 아쉽지만 그동안 고생했던 기존 바지를 홀가분하게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고 이제 여유롭게 기차표를 끊으러 가야겠다. 아오 빗나갔다. 다시 가서 주워서 넣고 왔다.
역 플랫폼은 철제 구조로 돼 있는데 이게 꽤 웅장하다. 스팀펑크라고 하나? 영화 가위손이나 파이널판타지 같은 분위기다. 기둥에 저렇게 듬직하게 박혀있는 볼트를 보니 심장이 두근거린다. 기둥을 너무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곧내 정신을 차리고 이대로 있으면 변태로 오인받을지 몰라 일단 표를 끊기로 했다. 영어랑 섞어서 베네'찌'야 를 어떻게 발음할지 연습하면서 매표소를 찾아다니고 있는데, 눈앞에 떡하니 자판기가 있길래 그냥 그걸 쓰기로 했다. 생각 없이 베네치아 역에 내리면 되겠지 싶어서 검색을 했는데 선택지가 두개다. 산타 루치아와 메스트레. 으악 어디로 가야하지? 이제 와서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 보자니 내 뒤에 어느새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게 아닌가? 1초간 고민하다 어차피 지구는 둥그니 그냥 찍기로 했다. 메스트레 역이 당첨되었다. 여기나 저기나 별 차이 없겠지!
역사 내에는 빨간색 우체통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우체통은 모두 빨간색인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별 이유 없고 그냥 눈에 띄는 색을 쓴다고 한다. 나라 별로 제각각인데 우연히 여기는 빨간색인 것이었나보다.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살짝 김샜다.
아무튼 표도 끊었겠다, 탑승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 여유롭게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지도만 보고 걸어온지라 역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 난 놀러 왔는데! 다시 밖으로 나와 햇볕도 좀 쫴야겠다. 역 건물 외곽에 Bar라고 써 있는 곳이 있었다. 메뉴를 보니 여기서 커피를 파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스타벅스 메뉴판이 죄다 이탈리아어로 돼 있던 덕에 은근히 익숙한 단어가 많다.
다만 메뉴에는 카페도 있고 라떼도 있고 카페 라떼도 있는걸 보니 카페(Caffe)는 커피, 라떼(Latte)는 우유인가보다. 찾아보니 에스프레소(Espresso)는 빠르다는 뜻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에스프레소는 굉장히 빨리 내린다. 아무래도 영어의 익스프레스 비스무리한 뜻인 것 같다. 그리고 메뉴에 아메리카노는 없는 것 같다. 카페 라떼를 한 잔 시키면 될 것 같다.
동네 문화를 모르니 문워크로 몇 발짝 뒤로 물러나서 사람들을 서너 명 관측해 보기로 했다. 뭔가 이탈리아의 햇살을 받아 커피의 맛을 여유롭게 느끼는 장면을 떠올렸는데 그런건 없고 다들 뭔가 시키더니 홀짝 홀짝 원샷을 하고 떠난다. 아니 이 동네 사람들은 왜 이리도 급한가! 역시 반도끼리는 통하는게 있는건가? 아무튼 점원 분에게 물어보니 자리에 앉으려면 추가로 돈을 내야 하는 것 같다. 카페 라떼를 시킨 후 앞 사람들 매냥 바에 서서 홀짝 원샷하고 나왔다. 그러고보니 에스프레소는 마시는 것도 빠른 커피인 것 같다.
이제 슬슬 기차에 탈 때가 됐다. 일단 슈퍼에서 맥주 두 캔을 샀다. 아오 이 역은 보면 볼 수록 웅장하다. 이 곳이 종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철도가 역을 관통하는게 아니라 광장 앞에서 끊겨있다.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영화 데스티네이션처럼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종착역이라는 단어는 꽤 매력적이다. 큭 가슴속의 뭔가가 벅차 오른다. 김현식 가수의 '이별의 종착역'을 BGM으로 틀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 길
아무래도 BGM을 너무 잘 뽑은 것 같다. 기차가 들어오는데 벌써부터 맥주를 까고 싶어진다. 조금만 참자. 일단 제일 소중한 핸드폰 충전부터 해야 한다. 다행히 플러그가 있었는데 얼핏 보면 비슷하게 생겼지만 우리나라의 플러그보다 조금 더 가늘다. 생각없이 끼웠는데 잘 안 빠져서 내릴때 고생했다. 아무튼 어디서 자야 할 지 정해야 한다. 일단 지도를 보니 섬과 내륙으로 구분되는데, 섬이 두세 배 정도 비싸다. 아무튼 예산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눈물을 훔치며 내륙의 숙소를 예약했다. 후아! 일단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
얼마전까지는 베네치아는 '현'이었다는데 광역시로 승격됐다고 한다. 현이라니 생소한 행정구역이다. 왜 '시'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뭔가 차이가 있긴 한 것 같다. 아무튼 고속 열차이다보니 두어 시간 정도 걸려 금방 도착한 것 같다. 베네치아 하면 뭔가 세련되고 예쁠 줄 알았는데, 출구로 나오니 뭔가 힙스터 마을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음... 아무튼 숙소까지는 40분정도 걸어야 할 것 같다. 이 길이 맞는가 싶지만 휴대폰 기본 지도 앱으로 찍으니 친절하게 길 안내가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쓸 일이 없던 기본 지도 앱이 이렇게까지 친절하다니 새삼 놀라웠다. 아무튼 몇 킬로 더 가서 좌회전하라니 동네 구경이나 해 볼 겸 스믈스믈 걸어갔다. 마침 목이 마른데 가는 길에 슈퍼라도 있으면 음료수나 사 마셔야겠다.
가는 길에 기찻길이 있어 어찌 건너야 하나 했는데 어두컴컴한 다리 같은것이 있어 그리로 갔다. 올라가는 길이 조금 무서웠는데 귀신이 나올까봐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구석에서 힙스터가 튀어나올까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손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왔으니 누가 봐도 여행객이라고 생각하긴 힘든 비주얼이다. 일단 초짜 티 내지 말고 태연하게 통과하기로 했다.
휴 결국 다리 위로 올라왔다. 아까는 무서웠지만 이곳은 밝은데다가 차들도 많이 돌아다녀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사실 처음에 기차역에서 반대쪽 출구로 나갔으면 되었겠지만 여행의 묘미란 이렇게 돌아 가는 것에 있지 않은가?
다리를 통과하고 나니 갑자기 도시로 바뀐 느낌이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이게 베네치아야?' 싶을 정도로 시골이었는데 그냥 내가 기차역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떠돌아서 그런 것 같다. 어쨋든 조금 더 걸어가니 에어비엔비에서 예약했던 숙소가 나타났다. 이 동네는 신기하게 인도에서 온 분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인도 영화에서 보던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집이 많은 것 같다.
집 안도 아기자기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이탈리아는 뭔가 단색의 고풍스러움 같은게 있었는데, 동네마다, 혹은 집집마다 분위기가 다른가보다. 한참 걸었으니 잠깐 침대 위에 누웠다가 10초쯤 쉬고 다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일단 마트에 가서 뭘 살까 하다가 와인 한 병을 샀다. 3유로라니 정말 싸다. 그리고 산 김에 베네치아 섬에 들어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친절하게 버스 타는 곳을 알려주셨다.
버스를 탔는데 30분 넘게, 한참을 간다. 아무래도 걸어왔으면 큰일날뻔했다. 순식간에 해가 지고 밖이 어두워졌다. 긴 다리를 건너 드디어 종점에 도착했는데 하늘이 벌써 어두워졌다.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물의 도시! 사람들도 많아 소란스러웠다. 건물이 많아서인지, 섬이라 그런지 GPS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길 잃은 셈 치고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 돌아다녀봐야겠다.
혼자 다닌다는 것은 참 기분이 좋은게, 이렇게 생각없이 아무거나 먹고 아무데나 돌아다녀도 된다는 것이다. 허기는 좀 지지만 간단하게 피자 한 조각과 맥주 한 병을 산 뒤, 운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음식에 초록빛이 감돌면 그건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정말 맛이 없었다 으웩. 이곳은 물가도 엄청 비싼데, 그냥 허기만 달랜다고 생각해야겠다.
여기저기 좁은 골목 구석구석에 아기자기한 가게가 많다. 사실 돈만 있었으면 뭐라도 샀을텐데, 가방이 좁은 핑계를 더해 사진으로만 간직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 또 올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빠르게 '미리보기' 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감탄스러워서 자꾸 발을 멈추게 된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가게가 하나 둘 닫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한다. 나도 여기에 갇힐 수는 없으니 마지막 버스를 타고 숙소로 복귀했다.
집에 와서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다 돼 간다. 간단하게 오늘의 장면을 끄적이고 나니 바로 곯아떨어졌다 . 하루종일 걸어다녔더니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