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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규 Sep 15. 2017

HQ: 아르바트 거리

2014.09.05, 모스크바#1

# 발단


어렸을 적에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항상 첫 항목은 가가린이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거의 적국 사람 같은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매번 궁금했다. 저 동네 사람들은 대체 뭔 생각을 했길래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보다도 더 한참 전인 60년대에 우주에 다녀왔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마침 러시아 무비자 협정이 체결되었다. 혼자서 해외로 나가 본 적은 없지만 누구는 우주에도 다녀왔는데 나라고 사람 사는 곳에 못 갈 이유는 없다.   


인터넷에 들어가 항공권을 예매했다. 결제하는 순간 통장이 가벼워지는 느낌의 찌릿한 전율이 느껴진다. 이제 숙소를 구해야 하는데 구글에 검색해보니 마침 모스크바 시내에 한인 민박이 있어 그곳에서 4박 5일간 묵기로 했다. 일단 이곳을 전초기지로 삼고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야겠다.


# SU-251

아에로플로트 항공기 입구. 키릴 문자 덕분에 우주선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놓고 까먹고 있었다. 이놈의 일이라는 게 끝이 없어서 매일같이 정신없이 일하다 새벽에 퇴근하고 나니 어느 날 캘린더의 알람이 울렸다. 아뿔싸 오늘이 출발이구나. 9월 5일이다. 퇴근하자마자 후다닥 짐을 싸고 미친 듯이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갔다. 인천공항에서  모스크바 쉐르베찌에보 공항까지는 8시간 정도 걸린다. 비행 도중 심심할 것 같아 33개의 키릴 문자 알파벳을 뽑아 왔다. 러시아어는 말이 어렵지 글자는 그대로 읽기 때문에 공부하기 꽤 쉽다. y(u), p(r), c(s)같이 조금 헷갈리는 녀석들도 있지만 그것만 빼면 별로 안 어렵다. 특히 Γ(g)는 그리스 문자 gamma, Φ(f)는 phi를 생각하면 금방 외워진다.

지도만 보고도 이렇게 설렐 수 있다니! 아쉽게도 북한을 통과하지는 않았다.

항공편은 아에로플로트 SU251, 보잉777 기종이다. 막상 타보니 한국인이 잔뜩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서 왠지 안심이 되었다. 마침 옆자리에 앉은 분도 내 또래의 한국인이었다. 잠시 인사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형님은 한국에서 문화교류 활동을 하던 중 우크라이나 국적의 여성분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연애 후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 항로를 타고 신부의 가족에게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키예프로 향한다고 했다. 이 분도 나만큼이나 떨리는 길을 떠나오셨구나. 얼마 안 가서 비행기는 착륙했고 우리는 살아 돌아오길 기원하며 헤어졌다.


비록 동구권이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밟아보는 유럽땅이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얘기가 달라졌다. 주변에 잔뜩 있던 한국인들이 죄다 경유노선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 옆을 보니 덩치 큰 슬라브 형님들만 남았다. 벌써부터 무서워졌다. 입국심사 줄에 서있는 한국인은 나 혼자 뿐이다. 알 수 없는 소외감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과연 나는 4박 5일동안 무사히 여행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인가?


아에로익스프레스는 디자인이 꽤 예쁘다.


입국심사가 까다로울까 봐 걱정했지만 하면서 다행히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무사히 입국심사를 마치고 기차에 탑승하기 위해 자판기를 찾았다. 모스크바로 가는 고속 열차의 이름은 아에로익스프레스라고 했다. 다행히 여기저기 기차 아이콘과 함께 친절한 이정표가 탑승구까지 나를 안내했다. 가는 길에 기차표 자판기가 보였는데, 다행히도 영어 표기가 되어 있다. 탑승권을 발권한 뒤 기차에 탑승했다. 이곳 사람들의 인상은 대단히 험악하다.


그라피티가 수 킬로미터정도 펼쳐져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차창 밖에는 끝없는 벌판이 펼쳐졌다. 정말 이 근처에는 산 같은 게 없다. 그리고 도시 외곽이라 그런지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살짝 폐허 같은 느낌이었다. 철도 장벽에는 끊임없이 그라피티가 펼쳐져 있었다.


#3 모스크바 벨로루스키 역

드디어 모스크바 벨로루스키 역에 도착했다.

열차는 40분 정도 후에 모스크바 중심지로 들어가서 벨로루스키 역에 도착했다.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이곳은 처음 지어진 것은 1870년이지만 1912년에 다시 지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유럽으로 가는 거대한 기차역이라 그런지 역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역 광장 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전쟁으로 이별하는 남녀의 동상이었다. 그 앞에 어떤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다가와서는, 국화 꽃다발을 동상 앞에 놓았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슬퍼 보였다. 헤어진 옛사랑이 생각나서일까,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이별이라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역 밖으로 나오니 시원시원하다. 기온은 23도다.
환전소는 역 부근이 가장 싸다고 한다.

가장 효율적으로 환전을 하는 방법은 한국에서 US 달러로 환전한 뒤 이곳 기차역 부근의 환전소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환전소 앞에는 저렇게 환율이 표시된 간판이 있어 단어를 모르더라도 찾기가 대단히 쉽다.

예술적인 방공호, 모스크바 지하철
벨라루스까야 지하철역

지하철을 타려고 subway의 'S'마크를 찾아다녔는데  그 'S'마크를 도통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찾아다니다 정답은 metro의 'M'이라는 걸 깨달았다. 매표소에서는 1회, 5회, 20회 티켓을 판매하고 있었다. 일단 1회용 티켓을 사기로 결심하고 'one, one!'을 외치며 티켓을 사려해 보았지만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곤란했는데, 손가락 한 개를 폈더니 간신히 그 뜻이 통했는지 1회용 지하철 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테러를 의식했는지 모든 공공건물에 들어갈 때에는 짐 검사를 한다.

지하철 표가 귀엽다. 입장할 때 한번만 찍으면 된다.
에스컬레이터는 한없이 깊게 내려간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정말 한없이 내려간다. 깊기로 유명한 서울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보다 조금 더 깊은 것 같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핵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방공호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모든 구간이 아치형 구조로 되어 있어 더더욱 견고해 보였다.

러시아에서 칸트의 철학에 관한 논쟁 도중 총격 발생 (2013.09.16)

이곳 사람들은 책을 정말 많이 읽는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비는 속에서 책을 펴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젊은이들은 전자책을 들고 있다. 험악한 표정으로 책을 읽는 이곳 사람들을 보며 문득 작년에 칸트의 철학에 관한 논쟁 중 총격이 발생했다는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모든 지하철 역이 예술 작품처럼 대단히 아름다웠다.
심지어 환승 구간조차도 정말 아름답다.
비행기에서 열심히 공부해 둔 덕에 목적지인 스몰렌스카야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스몰렌스카야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 출구의 위엄

두 번 환승을 해서 목적지인 스몰렌스카야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의 내부, 특히 스몰렌스카야의 출구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역에서 조금 걸으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묵을 곳은 6인실이었는데, 여기서 한 여자분을 만나 인사를 했다. 그분은 조선족이라고 했는데, 근처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를 찾아왔다고 했다.


# 아르바트 거리


이제 막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왠지 바깥 구경을 하고 싶었다. 마침 그분도 바람이나 쐴 겸 붉은 광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해서 함께 길을 나섰다.

숙소에 들어갈 때만 해도 아직 저녁이었는데, 짐을 풀고 나왔더니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우측의 사진은 러시아 외무성이라고 했다. 오래된 고층건물을 처음 봐서 그런지 정말 신기하고 낯설다. 붉은 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대학생들의 거리라 불리는 아르바트 거리가 있다. 젊은이들의 혈기가 정말 강렬하게 퍼져 올랐다. 볼거리는 정말 많았지만 우선 오늘은 첫날이기도 하고 숙소 바로 앞이기도 하니 일단 빠르게 지나가기로 했다.

해가 떨어졌는데도 사람이 붐비고 있다.
스프레이 예술을 하는 청년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게들이 꽤 있다.
기온은 17도다. 추울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따뜻했다.
기념품 가게도 꽤 많다. 돌아갈 때 잔뜩 챙겨가야겠다.
불곰 형님들의 길거리 공연
삐에로는 왠지 러시아와 잘 어울린다.
맥주가 술이 아니었다니

2011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에서는 맥주는 술이 아닌 음료로 분리됐다고 한다. 아무튼 저녁에 마실 술을 한 병 사야겠다. 이곳에서는 밤늦게 마트에서 술을 판매할 수 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다행히 너무 늦은 시각이 아니었는지 보드카를 한병 구입할 수 있었다.


# 붉은 광장


지하도를 건너고 조금 더 가니 거대한 공원이 펼쳐졌다. 정말 끝이 없는 광장이었다. 불곰국 스케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마침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사진에 담겨버렸다. 잠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하다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왼쪽 건물이 박물관이라고 했다. 광장에서 화려하게 불꽃이 펼쳐지고 있었다.
늦은 시각인데도 차들이 꽤 많이 지나다닌다.
술집인 것 같다. 동상마저도 낭만적이다.
이곳의 동상에서는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바싹 긴장한 상태로 인증 사진을 찍었다.

이게 고작 하루동안 일어난 일이다.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씻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아까 그분이 찾아와서 보드카를 마시자고 했다. 아차, 깜박하고 있었구나. 그분은 어디선가 도시락 컵라면을 두 개 가져왔다. 이게 러시아에서는 인기가 꽤 높다고 했다. 둘 다 피곤해서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취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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