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06, 모스크바#2
술이 덜 깬 채로 일어나보니 아홉시다. 더 자고 싶었지만 민박에서 주는 아침식사를 먹기 위해 무조건 일어나야 한다. 이곳은 물가도 꽤 비싼데다가 챙겨온 예산이 거의 없기 때문에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어둬야 한다. 식사하면서 다른 투숙객들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다들 출장을 왔고 여기까지 놀러온 사람은 나밖에 없는듯 했다. 마침 B라 불리는 형님이 우주박물관이 있는 베데엔하쪽으로 간다고 해서 함께 가보기로 했다.
가보자! - 유리 가가린, 1961
그래도 아침 일찍 이렇게 나오니 상쾌하다.
이 동네 지하철은 자비가 없다. 출발하자마자 문을 쾅 닫아버린 채 폭풍처럼 악셀을 밟는다. 출발할 때 엄청나게 쏠리니 손잡이를 꽉 잡지 않으면 어느 새 불곰 형님의 품 속에 안겨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역 이름이 엄청나게 길다. '국민경제 성과 전람회장'이라는 뜻이란다. 첫 글자 알파벳만 따서 베데엔하라고 부르는 것 같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에 보이는 미사일 모양 조형물이 보였다! 짐승처럼 달려가다가 B형님에게 혼났다. 내가 여길 보려고 지구 반바퀴를 돌아 왔는데!
미친듯이 달려서 박물관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얼추 만 오천원 정도인데, 같은 가격으로 사진 촬영권을 추가로 구매할 수 있다.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다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1957년에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 세계 최초로 라이카(Лайка)라는 이름의 개를 태우고 162일간 비행했다. 우리나라의 바둑이 비스무리한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목표대로라면 임무 수행 이후 주사기를 통해 안락사되어야 했지만 발사하자마자 스트레스와 과열로 고통스럽게 사망했다. 결국 3년 뒤 스푸트니크 5호에 탑승한 벨카와 스트렐카라는 개 두마리가 최초로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
쥘 베른의 소설인 '지구에서 달까지' 라는 책이 동시대 많은 거장들의 어린 시절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로켓 이론을 정립한 치올코프스키부터 시작해서 아폴로 계획의 책임자인 폰 브라운까지, 대부분의 거장들은 어렸을 때 그 책을 보고 꿈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모두가 엄청난 역할을 했지만, 결국 쥘 베른이야말로 꿈을 그릴 수 있게 해 준 우주 개발 역사의 대선배인 것 같다.
열악한 환경
인공위은 위도가 낮을수록 발사하기 쉽다고 한다. 인도가 가장 쉽고, 미국도 쥘베른 소설처럼 남쪽 끝에서 발사하는데 얘들은 저 북쪽의 카자흐스탄에서 발사했다. 귀환할 때에도 미국은 영해가 넓어 바다에 퐁당! 하면 되지만 소련은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에 착륙해야 한다.
짜릿한 전율을 몇 번 겪고 나서 뭔가 허무하게 관람이 끝났다. 다시 베데엔하로 나왔다. 정말 이 동네는 날씨가 구리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은건지 아니면 주말이라 그런건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가는 길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B형님께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공원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웨딩 촬영을 하는 부부도 보였는데 둘 다 너무 귀엽고 행복해 보였다. 공원 곳곳에는 쿠션이 널려있고 사람들이 그 위에 누워있었다. 공용 물품인지 개인용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편안해 보인다. 풍덩 소리가 나길래 쳐다보니 저 쪽에서는 내기에서 졌는지 누가 인공호수로 뛰어들고 있었다. 오늘도 불곰국 수도는 평화롭다.
그 앞에는 뭔가 하얀색으로 된 신기한 건물이 있길래 들어가 보았다. 로씨야 델라에뜨 사마, 검색해보니 과학 기술 박물관인 것 같다. 어렸을때 가봤던 종합 과학관 같은 느낌이다.
맞은편 건물에 들어가 보았다. 말 전시회 같은데 도통 알 수가 없다. 이곳에서는 기념품을 잔뜩 팔고 있다.
B형님은 업무 때문에 자동차 전시관으로 향했고, 우리는 헤어졌다. 지도를 찾아보니 저만치에 다른 지하철 역이 하나 있는 것 같다. 거리가 꽤 되지만 마땅히 할 일은 없으니 이왕 이렇게 된 바에 거기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숲이 있는 공원을 뚫고 나오는데만 한 시간쯤 걸린 것 같다.
드디어 밖에 나왔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마침 휴대폰 배터리마저 2프로 남았다. 후다닥 지도상 방향과 거리만 대충 봐두려고 하는데 전원이 꺼져 버렸다. 어차피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뭔가 나오긴 할 것 같다.
뭔가 갈 수록 엄한 곳으로 가는 기분이다. 도시의 풍경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왔던 길로 그냥 되돌아가 베데엔하로 가볼까를 한 열 번 쯤 생각해 본 것 같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좀더 오기를 부려보기로 했다.
귀환
M자가 보인다! 감동의 눈물을 훔쳐내며 달려갔다. 내가 지도에서 봤던 역은 이 역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신경쓰지 말자. 여전히 쾅쾅 달리는 지하철을 타고 HQ로 귀환할 수 있었다.
밥은 굶어도 술은 마셔야 한다! 환율은 간단히 30을 곱하면 되었는데, 보통 저 '벨루가'라는 보드카가 유명하다고 한다. 보드카 한병에 300~1000루블, 만원에서 3만원정도 했다.
동네 여기저기서 공연을 많이 한다. 이 곳 사람들은 정말 흥이 많은 것 같다.
마침 주말이고 하니 투숙객들끼리 모여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모스크바 역시 대도시답게 강을 끼고 있는데, 야경이 꽤 볼만했다. 다만 언덕이 없어서 뭔가 '내려다' 볼만한 장소는 없다. 강 이름이 궁금했는데 그냥 모스크바 강이라고 한다.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동네 술집에서 맥주 한잔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