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07, 모스크바#3
우주박물관에 다녀와버렸으니 이제 뭘 할지 딱히 아무런 계획이 없다. 숙소에서 아침식사가 제공되기 때문에 이걸 먹고 다시 들어가 자려다가 Y라고 불리는 투숙객 형님에게 붙잡혔다. 형님은 시장에는 꼭 가봐야 한다며 나를 붙잡고 나섰다. 가는 길에 다시 한번 느꼈지만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정말 과격하게 움직여서 순식간에 잠이 달아난다.
이즈마일로브스카야(Измайловская) 역이 다음 정거장이어서 헷갈리지만 한참 걷지 않으려면 파르티잔스카야(Партизанская) 역에서 내려야한다. 역 이름에서 뭔가 빨치산의 기운이 나는 것 같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Y형님은 ATM을 쓰기 위해 역 근처 쇼핑몰에 들르자고 했다. 생각해보니 환전 두번 하는것보다 ATM에서 찾는게 더 싸지 않을까? 하지만 난 월급을 모두 환전해 왔으니 그딴 생각은 가슴만 찢어지게 할 뿐이다. 여기저기 인형 가게가 많길래 잠깐 구경을 했다.
밖에 나와서 담배를 한대 피운 뒤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멀리서도 보이도록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뭔가 방치된 게 많아서 촌동네 유원지 같은 기분이 살짝 들기도 했다. 입구에서는 돈을 받는다. 10루블, 한 삼백원쯤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왜 받는 건지 모르겠다.
아기자기한 기념품이 많다. 시내보다는 훨씬 싸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들은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러시안 체스였다. 모든 세트마다 말이 다르게 생겨서 유니크함을 자랑한다. 다만 슬프게도 맘에 들 수록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잠시 담배를 피우러 시장 밖으로 나갔다 왔다. 그동안 돈 받던 사람이 사라져서 그냥 다녀왔다. 아직도 입장료를 왜 받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시장 안에는 상당히 멋진 범선이 한 척 있는데,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뭔가 유령선처럼 그냥 방치돼 있었다. 이것 말고도 러시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건축물이 꽤 많다.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하지만 한 끼를 굶어 기념품을 더 사자는 생각으로 버티기로 했다. 이 곳에는 없는게 없다. 박제 여우나 곰 가죽, 소련군 방독면같은 별의 별 것을 다 판다. 정말 없는게 없다. 심지어 총도 있다. 정말 당황스럽다. 참고로 총은 점원이 사진을 못 찍게 한다.
결국 러시안 체스와 크리스마스 장식을 몇 개 사기로 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직접 깎았다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집에 와서 기념품을 정리해보자. 미친듯이 비싼 이 동네 물가 치고는 정말 맘에 든다. 특히 체스와 크리스마스 장식은 세상에 하나뿐인 디자인이다. 뭔가 기분이 좋다.
아무리 절약모드라지만 인간적으로 맥주 한 잔 정도는 마셔야 할 것 같다. 아르바트 거리로 나와 호프집을 찾았다. 걸어가는 동안 처음보는 누군가와 합석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다들 혼자 마시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냥 혼자 마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