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08, 모스크바#4
암튼 술이 안 깬 채로 그냥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신기해 보이길래 무작정 갔다. 위키피디아를 열어보니 362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단다. 투숙객 분들이 왠지 개고생할 것 같다고 말렸지만 술기운에 무슨 패기였는지 숙소를 나서 버스 터미널까지 와 버렸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이 동네에서 지하철도 아니고 시외버스라니 지금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인 것 같다. 그래도 핸드폰이 있으니 길을 잃어도 꾸역꾸역 돌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냥 가 보기로 했다.
아무튼 외곽이다. 숄코브스카야(Щёлковская) 에 내려서 여기서 버스를 타야한다. 술도 깰 겸 362 버스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다. 모스크바 날씨는 항상 구리댔는데 오늘은 날씨도 꽤 좋다. 특히 구름이 너무 예뻤다. 그러고보니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다. 왠지 길을 물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다. 심지어 저 길건너에 써있는 저 은행 이름도 '구타'뱅크다.
버스를 타고도 한참 가야 할텐데 터미널에는 죄다 미니버스 뿐이었다.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어쨋든 내가 탈 버스를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아직 여기에는 안 온 것 같다. 그 순간 갑자기 저쪽 지평선 너머에서 어마어마한 포스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남극탐험이라는 게임을 자주 했었는데 거기 나오는 남극 기지처럼 포스를 쾅쾅 뿜어대며 버스 한대가 안개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중앙선을 넘어 20도정도 드리프트를 하며 인도 위로 올라왔다. 안개가 걷히자 전광판에 거대한 숫자가 드러났다. '362' 하필 내가 탈 버스라니 약간 술기운이 가시는 것 같다.
아무튼 출발했다. 고맙게도 버스에는 USB단자도 있다. 한 10분쯤 시 외곽으로 조금 나가니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정말 끝이 안 보이는 거대한 평원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나주에서 한번 본 이후로 지평선도 되게 오랜만이다. 핸드폰 상단에 있는 전파 강도가 한 칸씩 떨어져서 3G 마크가 E로 바뀌었다. 아무튼 한시간 좀 넘게 가다보니 조그마한 마을이 보였다. 버스가 멈추긴 했는데 방송을 못 알아들어서 일단 그냥 내리기로 했다. 여기가 모니노 기차역인 것 같다.
E의 위엄인지 지도를 한번 로딩할 때마다 5분정도 걸리는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보면 배터리는 5%정도 떨어져 있다. 분명히 버스에서 핸드폰을 만땅으로 충전했고 아직 출발도 안했는데 벌써 80%밖에 안 남았다. 아무튼 철길을 건너서 한 50분정도 걸어가면 될 것 같다. 기차역 위에 육교가 보였는데 입구를 찾다가 귀찮아서 그냥 산책이나 할 겸 우회하기로 했다.
근데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다. 한참을 걸어도 우회로가 안 보여서 다시 유턴을 할까 망설였지만 도박사의 오류 덕분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걷다보니 온라인 게임에서 로딩 오류가 난 것 매냥 이미 사방에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결국 지하도가 나타났다. 남극탐험 기지를 지금 써먹었어야 했다. 어쨋든 철길을 건너 다시 왔던 길로 돌아와서 모니노 역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눈 앞에 길이 보이면 무조건 그리로 가기로 했다.
아무튼 이제 여기서 40분을 걸어야 한다. 핸드폰 배터리는 한 30% 남은 것 같다. 일단 비행기 모드를 켜고 남쪽으로 30분만 걸어봐야겠다. 조금 가다보니 짓다 만 건물들이 한 두개 있더니 군부대같은게 나타났다.
끝없이 숲만 펼쳐지다가 드디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이 나타났다. 뭐시기 뭐시기 프로페시오날리즘이라고 써있는데 어쨋든 비행기 그림이 있으니 거의 다 온 것 같다. 옆에 할아버지도 한 분 계시길래 길을 여쭤볼 생각에 핸드폰을 켰는데 벌써 배터리가 다 돼서 꺼져버렸다. 망했다. 아무튼 비행기 그림이 나타났으니 조금만 더 가면 될 줄 알았는데 이놈의 숲은 걸어도 걸어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걸어 보았다.
드디어 뭔가 나타났다! 뮤제이라고 써있는데 뮤지엄 비슷한 것 같다. 심지어 저기 매표소가 있다고 써있다. 하늘에는 까치가 날아다니고 저쪽에서는 무지개도 보이는 것 같다. 눈물을 훔치며 입구로 들어가 보았다. 어? 근데 문은 열려 있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2층에서 직원분이 내려오시더니 깜짝 놀라서 너 여기 어떻게 왔냐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내가 러시아어를 못하는걸 깨닫고 더 당황하면서 뭐라고 하셨는데 왠지 '노' 랑 '먼데이'의 기운이 느껴졌다. 암튼 닫은 것 같다. 그 분은 안타까워 하면서 1층 사진이라도 찍으라는 듯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며 안내도를 가리켰다.
이제 핸드폰도 안 되고 집에 돌아갈 길도 막막하다. 내일 또 올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직원 분이 '박물관은 닫아서 못 보니 이거라도 볼래?' 하는 표정으로 나를 거대한 울타리 쪽으로 데려갔다. 울타리에는 입구가 있었는데 거기 경비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경비 아저씨는 얘기를 듣더니 껄껄거리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랬더니 뭔가 버그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진짜 전성기 시절 소련 스케일로 끝에서 끝까지 거대한 비행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 무슨 게임을 하다가 길을 잃고 헤메다 숨겨진 지역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이 끊기질 않았다.
개중에는 굉장히 실험적인 디자인도 많았다. 한때 미국과 나란히 했던 강대국의 힘, 그만큼 거대했던 국력과 한 편으로는 하늘에 대한 갈망이 담겨있었다. 그럼에도 퇴역하고 녹이 잔뜩 슨 채로 여기 방치되어 있는 녀석들을 보니 마치 몰락한 제국, 어쩌면 한 같은 것도 느껴지는 것 같다. 어쨋든 이 거대한 공간속에서 두시간 넘게 돌아다녔다. 경비 아저씨에게 '스바시바' 와 함께 목례를 했다. 아저씨는 윙크를 하며 나를 떠나보냈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온 길로 그대로 돌아가면 될 것 같다. 돌아가는 길은 훨씬 여유로워서 딱따구리 구경도 하고 하늘에 지나가는 거대한 폭격기도 보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슬금슬금 구경을 하면서 한시간쯤 걸어오니 기차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돌아가는 버스를 탈 줄 모르니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면 아무 지하철 역에 떨궈줄 것 같다. 어쨋든 모니노 역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벽이 막혀 있다. 다행히 조금 살펴보니 개구멍이 하나 있다.
어쨋든 모스크바라고 써있고 이걸 그냥 타면 집에 갈 수 있다! 일년치 고생을 다 했다는 생각에 흐뭇해하며 기차를 탔다. 그러나 고생은 끝이 아니었다. 기차를 타자마자 어떤 70대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나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가리키면서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러시아어로 사과도 할 줄 말라서 십분이 넘게 붙잡혀서 "쏘리" 만 부르고 있었는데 아주머니의 분노는 점점 더해져서 카메라를 빼앗아 부수려고 했다. 한참 뒤 구세주처럼 역무원과 젊은 커플 분들이 나타나서 아주머니를 달래 주었다. 다행히 남자분이 영어를 할 줄 알아서 통역을 해 주었는데 여기는 군 기지 주변이고 외국인들이 오지 않는 곳이라 아주머니는 내가 스파이인줄 알았다고 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투숙객 분들이 모두 모여서 한잔 하고 있었다. 민박 주인 아저씨도 잔뜩 신이 나서 온갖 진귀한 음식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한국당근'이라는게 유명한데 김치를 만들 재료인 배추나 고춧가루를 구하기 너무 힘들어서 옛 고려인들이 당근으로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 먹던게 유래라고 한다. 약간 피클 비슷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