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
세 시간 조금 넘게 날고 나니 구름을 뚫고 히말라야가 보이기 시작한다. 짧은 비행 시간 치고는 티켓값이 대단히 비싸서 놀랐었는데, 청룡열차를 타고 내려오는듯한 현란한 착륙을 겪고 나니 그저 조종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비행기도 A319, 거의 국내선마냥 작은 기종이어서 놀랐지만 기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저 뾰족한 산등성이에 긁혔을 것이다. 아무튼 조금 무섭긴 했지만 그걸 떠나서 말도 안되는 장관이었다. 동영상으로 남겨두지 않았으면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기온은 19도, 대단히 서늘했다. 적도 근처임에도 고도가 높아서인지 우리나라의 가을과 비슷했다.
드디어 작은 공항에 착륙했다. 이곳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에 해당하는 파로 국제 공항이다. 비행기는 우리 것을 포함하면 딱 두 대 있었다. 공항 청사는 되게 신기하게 생겼는데, 전통 건축 양식으로 디자인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건물은 곡선을 꽤 많이 쓰는 편인데, 이 곳 공항청사는 굉장한 직선미를 자랑했다. 웅장하다기보다는 산속에 소박하게 꽂혀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부탄 왕과 가족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입국을 강력하게 (돈으로) 제한하고 있는 나라여서인지, 아니면 험난한 항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항공편이 많지 않은 이 작은 공항청사는 뭔가 소박하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우린 걸음이 제일 빨랐기 때문에 제일 빨리 들어갔고, 덕분에 공항 내 사진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입국허가소에서 프린트된 비자 증명서를 제시하니 비자 도장을 찍어주었다.
왜 있지 않은가, 공항에 입국하면 사람 이름이 써져 있는 종이를 들고 계신 분들. 자주 보던 장면이지만 그곳에 내 이름이 써져 있는 광경은 처음이다. 뭔가 감동적이었다. 붉은색 전통 의상을 입은 키크고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이름은 뻬마라고 했다. 타이핑이 귀찮으니 앞으로 페마라고 적어야겠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운전을 맡아 주실 운전 기사 - 레끼라고 했다 - 형님이 서 있었다. 이 분도 내 맘대로 레키라고 해야겠다. 이 곳의 영어 교육은 대단히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역시 페마의 영어 또한 대단히 유창했다. 오히려 내 영어가 모자라서 큰일이다.
여행 계획서에 써 있었지만, 우리의 첫 숙소는 수도인 팀푸 시내에 있다. 페마는 일단 시내로 가서 숙소에 짐을 풀자고 했다. 나미비아와 같이 이곳 차량도 핸들이 오른쪽에 달려있었는데, 이거 영 어색하다.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와 차를 타고 이동했다. 페마는 급하지 않으니 내려서 구경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했다.
자유 여행(말이 그렇지 항상 방황이나 모험이었던 것 같다.)에 너무 익숙해서인지 가이드인 페마가 있으니 뭔가 '이지 모드'를 진행하는 기분이 든다. 길가에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데, 부탄에서 남쪽 특정 구역을 제외하고는 살생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동물들은 자유롭게 풀어두고, 대신 우유는 짠다고 했다. 페마와 레키 모두 고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고기는 대부분 외국, 특히 인도에서 수입한다고 했다. 모두 고기를 좋아하니 앞으로 풀만 먹을 걱정은 없겠다 싶어 미소가 나왔다.
건물들을 보면 집은 되게 레고블럭 끼워넣듯 소박하지만 주변의 담장이나 울타리, 땔감 같은 것들이 대단히 힘있게 꽂혀있다. 담장 하나하나 저렇게 예쁘게 꾸며놓은 것을 보니 역시 불교국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가다보니 점점 큰 마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림같은 광경이 감탄스러워 잠시 내려 사진을 찍기로 했다. 찜통같은 방콕을 지나오느라 복장은 추레하지만 그래도 사진은 평생 남는 것이니!
드디어 팀푸에 도착했다. 사람도 많고 공공시설도 대단히 많이 보인다. 제일 먼저 보였던 것은 공연장 같아보였는데, 이 곳에서 뭔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잔뜩 모여앉아 관람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복장을 보니 뭔가 경제력이 있어 보였다. 저 전통 의상도 퀄리티에 따라 가격차가 나지만 보통 우리나라 정장급으로 비싼 것 같다. 찾아보니 부탄의 1인당 PPP는 베트남보다 높고, 태국보다 약간 낮다.
이제 카페에 앉아 각자 자기 소개와, 앞으로의 여정이 대해 이야기했다. 이곳 카페는 참 예뻤는데, 그래서 그런지 커피도 맛있었다. 예전에 이메일로 전반부는 좀 쉬엄쉬엄이지만, 후반으로 갈 수록 극한의 여행이 되도록 부탁해 두었는데, 어무이께는 살짝 순화해서 말씀드렸다. 점점 아름다운 광경속으로 가는 것으로..
24시간 가까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지쳤다! 하지만 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조금 더 힘내서 숙소에 짐을 풀고 시내 산책을 하기로 했다.
페마는 근처에 시장이 있는데 구경하겠냐고 했고, 우리는 그러자고 했다. 우리나라의 농산물 시장 같은 분위기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다. 이렇게 모두가 신이 나 있는 곳은 정말 처음이다.
아이들이 꽤 많다. 어렸을때 어무이와 시장에 갔던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울지도 않고 다들 착했다. 시장 안에는 개들도 많이 있었는데 개들마저 순둥순둥해서 동물을 사랑하는 어무이를 홀리게 만들었다.
불교에서는 오신채라고 하여 매운 음식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오신채가 결정되고 나서 도입돼서 그런지 고추는 많이 애용되나보다. 이곳 요리에서는 고추가 거의 우리나라 마늘 수준으로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어떤 아재가 떨이라면서 사과를 하나씩 주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다니 감탄을 하며 받았는데, 알고보니 페마의 친구라고 한다. 사방에 먹을 것이 있어 더더욱 그런 것 같지만 사람들 표정이 한결같이 밝다. 너무 신나서 춤을 덩실덩실 추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짝 미소짓는 행복의 미소 같은게 느껴졌다. 페마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밖에 나가면 이정도 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이 행복한 편이라고 했다.
간단히 돌아보았으니 이제 좀 쉴 시간이다. 어무이께는 죄송하지만 호텔에서 투숙하는 날이 별로 많지 않게 일정을 잡아두었기 때문에 오늘을 즐기기로 했다. 면세점에서 사온 강력한 위스키는 보름을 먹어도 남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훗날 우리의 생명수가 된다.
호텔 식사라니! 뭔가 고오급진 느낌에 나와는 어울리지 않은 광경이어서 어무이도 놀라셨다. 이곳의 메뉴는 인도 음식과 부탄 음식이 있는데, 기후가 서늘해서 2모작이 되지 않는 탓에 불면 날아가는 그 맛없는 롱 그레인이 아닌!! 우리나라와 비슷한 밥이 나왔다. 이곳의 김치에 해당하는 국민반찬은 치즈고추 라고 했는데, 이것이 정말 짭짤 매콤하고 맛있다. 정말 밥도둑이다. 앞으로 얘만 있어도 식사는 걱정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인도식 카레와 닭조림도 주문했다. 우린 다들 매콤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두 매콤한 것으로 부탁드렸는데, 저렇게 접시에 작은 반찬을 주문한 뒤 밥 위에 얹어 먹는 방식인 것 같다. 카레도 맛있었고 닭조림도 맛있었다. 닭조림은 약간 덜 매운 닭도리탕 느낌이라고 하면 딱인 것 같다.
이렇게 첫날 일정이 끝났다! 숙소에 와서 위스키를 한잔 하고 깊은 밤 속으로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