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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규 Nov 02. 2017

참새 언덕

2014.09.09 모스크바 #5

# 삼보70


어제 술 마실 때 신기한 알약을 하나 받았는데 고 녀석이 신통한 것 같다. 분명히 마신 양으로는 거의 요단강 건널 수준이었는데 아침이 되니 무슨 CF 장면처럼 눈이 번쩍 뜨인다. 기억이 살짝 드문드문 비어있긴 하지만 투숙객 중 한 분이 낮에 잠이나 퍼자지 말고 같이 견학이나 가자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뿔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후딱 일어나서 씻어야겠다. 하지만 아침 8시 출발이라니 일찍 일어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목적지는 삼보70이라는 학교다. 시 외곽으로 좀 멀리 한 사십분정도 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모스크바에서 택시는 처음 타본다. 가는 길에 통역하는 형님도 같이 만났다. 셋이 함께 잠시 슈퍼에 들러서 물을 좀 산 후 계속해서 이동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오랜만에 차를 탔더니 멀미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
거리가 꽤 된다. 25km, 차로 40분정도 걸린다.

뻥 뚫린 길이라 그나마 다행이지만 숙취와 더해진 멀미는 그야말로 고통스럽다. 오늘은 이 악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쫓아다녀야겠다. 어쨋든 삼보70에 도착했다. 이곳은 체육 특성화 학교인데 초중고가 합쳐진 형태라는 것 같다. 교감선생님이 직접 나와서 안내를 해 주셨다. 학교 안에 들어가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학교 시설은 정말 미쳤다.  건물 내에 사우나도 여러 개 있고 반짝거리는 실내 체육관도 종목별로 다양하게 있었다. 심지어 이 학교를 졸업하면 군대도 면제라고 했던 것 같다.

수업 도중 쭉 늘어서서 인사를 해 주신 학생 분들에게 죄송했다.

통역 형님 덕분에 학교의 역사라든지 이것저것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지만 기억은 안 난다. 어쨋든 다 같이 여러 건물을 거쳐 체육관과 사우나 기숙사, 교실을 거쳐 여러가지를 구경했다. 신기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들고 폴짝거리며 쫓아다녔다. 청소를 한 지 얼마 안 됐는지 바닥이 엄청나게 반짝였다. 너무 반짝거리길래 앞에 가는 분들 중 한 분이 미끄러질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내가 자빠졌다. 


제대로 자빠졌다. 엉덩이와 뒷통수를 바닥에 박았다. 세상이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였다. 난 애초에 불청객이었기 때문에 태연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죽을 것 같다. 귀에서 삐 소리가 아직도 나는 것 같다. 덕분에 술은 깼지만 앞으로 며칠동안 꼬리뼈를 붙잡고 다닐 삘이다. 잠시 후에 깨달았는데 나만 안 괜찮은게 아니라 카메라도 고장난 것 같다. 웃는 표정으로 울면서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아무렇지 않은 듯 따라 걸었다.

아오 카메라가 고장났다.

사실은 카메라 때문에 미치겠지만 계속 만지기도 뭐 해서 그냥 문제 없는 척 들고 다녔다. 접견실에서 간단한 식사를 대접받았는데 호밀빵 느낌의 거무잡잡한 빵에 햄 같은걸 끼워서 먹는다. 빵을 별로 안 좋아해서 마술부리듯 햄을 세 장 집어서 빵에 끼워서 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 곳 방식의 식사는 처음인 것 같다. 식사 후에는 홍차를 마셨는데 이 분들 후루룩 소리를 안 내고 그냥 마신다. 엉덩이도 아파 죽겠는데 남들 따라 홀짝 홀짝 마시다보니 입도 삶아졌다. 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다.


# 부활


아무튼 숙소로 돌아왔다. 몸이 아픈건 둘째치고 들어오자마자 잽싸게 방에 들어와서 죽은 자식 불알만지듯 미친듯이 울면서 카메라를 꺼냈다. 전원을 켜보니 구동계가 완전히 나갔는지 힘아리가 없이 디기딕디기딕 거리다가 초점을 못 맞추고 꺼진다. 하늘이 노랗다. 핸드폰을 꺼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구글 검색을 해 보았다. 다행히 어떤 커뮤니티에서 누가 영어로 울면서 징징거리는 글을 올렸는데 어떤 사람이 답변으로 '믿기지 않겠지만 때리면 된다'고 써놨다. 피식거리며 설마 저게 되겠냐 하는 생각으로 주먹으로 쾅 때려 보았다.


근데 정말 켜졌다.


다시 숙소를 나와 지하철을 타고 강변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 참새 언덕


모스크바는 어마어마한 평야 지대이다. 여기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 전경을 한 눈에 보고 싶어서 '모스크바 높은 곳'으로 검색해보니 참새 언덕이 뜬다. 마침 숙소에서 가깝길래 지하철을 타고 근처로 가보기로 했다. 죽음의 1호선을 타고 미친듯이 쾅쾅 달려서 보로비요비 고리(Воробьёвы Горы: 참새 언덕)에 내렸다. 역 이름도 꽤 귀엽다.

역 플랫폼은 지상에 있다.
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뭔가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다.

아무튼 역에 내리면 작은 언덕이 있다. 막상 가보니 정말 이름처럼 귀여웠다. 해발 200m라니 동네 뒷산보다 납작한 수준이다. 근데 문제는 이게 너무 납작해서 어느 쪽이 높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도를 보면서 헤메다보니 결국 밖으로 빠져나와서 무슨 공원같은게 나왔다. 언덕은 포기하고 이 기세로 모스크바 대학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알 수 없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람들이 모여있다. 전망대같은데 못 올라가는 것 같다.

가는 길에 전망대 비스무리한게 있어서 저기라도 올라가볼까 하고 신이 나서 달려왔는데 못 올라가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나도 같이 신이 나서 같이 뛰어놀까 했는데 근처 바닥에 예사롭지 않은 낙서가 있길래 가까이 가서 보기로 했다.

디테일을 보아하니 어른들이 그려준 것 같다. 근데 탱크라니
이정도 솜씨라면 분명 어른들이 그렸을거다.

아이들이 그린건지 어른들이 그려준건지 한참을 살펴보다가 어른들이 그려준걸로 결론내렸다. 아무튼 낙서가 정말 예쁘다. 내 키가 컸다면 하늘에서 예쁘게 찍었을텐데 불행히도 내 키는 2미터가 안된다.

이렇게 고요한 진한 초록빛 길이 왤케 좋은지 모르겠다.

아무튼 국토의 70%가 산인 우리나라에만 있다보니 이런 평야지대는 꽤 신기하고 낯설다. 텔레토비 동산도 여기에 비하면 험준한 곳이다. 심지어 이 곳은 계획도시여서 그런지 어디를 가도 자로 재 놓은 것처럼 길이 쭉쭉 뻗어져 있다. 몇 시간 정도 걷다보면 정말로 심시티 게임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모스크바 대학


모스크바 대학에 도착했다. 이게 신관이고 저 멀리 있는 건물이 본관인 것 같다.

저 뒤에 배경으로 깔려 있는 거대한 건물! 구글 이미지 검색에 나오는 모스크바 대학이 맞는 것 같다. 이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캠퍼스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도상으로는 여기가 신관이라는 것 같다. 학교가 넓어봤자 학교겠지 생각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본관까지 슬금슬금 걸어가보기로 했다.

불곰국의 스케일

가는 길에는 운동장이 몇 개 있다. 여기도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는데 확실히 땅덩어리가 넓다보니 운동장마저도 끝이 안 보이게 지어놨다. 이 동네의 사람들은 뭐든지 거대하게 만들어 놔야 직성이 풀리나보다. 그나저나 저 본관이라는 건물은 한참 아까부터 보이더만 걸어도 걸어도 무슨 신기루 매냥 계속 그대로다. 가까워 보이는 것은 훼이크였나 도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나타나는 것인가? 

아니 무슨 신기루인가 가도 가도 계속 배경으로 깔려있다.
드디어 본관에 도착했다. 오는동안 해가 졌다.

한참을 걸어서 기어코 본관에 도착했다. 굉장히 오래 걸렸다. 이 미친 놈들은 대학 건물 마저도 하늘을 찌를 기세로 지어 놨다. 건물이 너무 크다보니 멀리서 봐도 가까워 보이는 착시효과가 있다. 심지어 오는 동안 해가 져 버렸다. 좀더 들어가려면 울타리같은걸 넘어야 하는데 입구를 도저히 못 찾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전기 버스


HDR 때문에 자동차의 잔상이 남았다.
아파트를 저렇게 호화롭게 지어놨는가

이곳에는 전기 버스가 굉장히 많아서 하늘이 온통 전선 투성이다. 더듬이 달린 버스들이 계속 지나가는데 그게 꽤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궁금해졌다. 저 더듬이는 어떻게 전선에 붙어있는 것인가? 심지어 저 전선은 사거리 같은 곳에서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걸어다니면서 보면 더듬이를 떼고 그냥 지나다니는 버스도 있다. 그렇다면 매달려 있는게 아니라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갈라지는 부분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되게 신기하다. 버스 몇 대가 지나가는동안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 장치 안에 기차 레일처럼 철커덕 하고 움직이는 놈이 있어서 미리 길을 바꿔 놓는 것 같다. 아무튼 하늘에 저렇게 전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왠지 멋있다.


퇴근길 보행자의 여유
대여용 자전거가 있는데 어떻게 결제해야 할 지 몰라서 넘어가기로 했다.
퇴근시간이 되니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슬슬 영업 준비를 하시는 밴드 형님들


# 모스크바 강


돌아가는 길에 참새 언덕 정상을 찾는다는게 결국 또 못 찾고 강변으로 나와버렸다. 어차피 올라가봤자 뭐 보이지도 않을텐데 그냥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석경이나 구경하기로 했다.


이곳 사람들은 기회만 생기면 어디든 걸터앉는다.
어디를 가도 낙서가 되어 있다.
아무튼 참새언덕 전철역은 굉장히 예쁘다.
한강시민공원
오 유람선도 지나다닌다.
아름다운 석경! 맥주 한 캔 있었으면 딱일텐데
한참을 걸어왔더니 철교가 나온다.
이 커플들은 아마 따로 결혼했을거다.
여기까지 들어가서 낙서를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이 곳 사람들의 낙서에 대한 열망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도저히 사람이 갈 수 없어 보이는 높거나 구석진 곳을 쳐다보면 항상 낙서가 있다. 그래서 낙서를 살펴보면 항상 젊음과 패기가 방사선처럼 뿜어나온다. 이 곳 사람들은 진짜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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