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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ebibu Apr 10. 2024

우정의 가능성

총선을 기다리며 그리고 <사상검증: 더 커뮤니티>

이름의 문제

“저기요”라고 고깃집 직원을 부른다. “저기”라는 근본 없는 말로 도움을 요청하는 내 노력이 영 탐탁지 않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식당 직원을 다양한 호칭으로 부르는 실험을 즐겼다. 예를 들어:

사장님 (누가 봐도 이 집 사장 아님)

아저씨 (나이 많아 봤자 스물다섯)

오빠 (의도치 않은 플러팅?)

등등… 식당 손님으로서 “저기요”보다 효과적인 호칭을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그때 모르는 사람을 내 멋대로 정한 호칭으로 (“아저씨…? (머뭇)”) 부르는 게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지 못한 관계로 결국 어색하게 팔을 휘저으며 “저기요”라는 부르는 걸로 퉁치게 됐다. 한국은 테이블에 호출 벨을 탑재해 이 난처한 고민을 해결해 버렸고.


미국에 오니 호출 벨이 없다. 대신 식당 직원이 대뜸 통성명하는 게 아닌가. “안녕, 오늘 네 테이블을 담당하는 소피야. 필요한 것 있으면 편하게 불러줘.” 호칭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름을 알게 됐으니 이제 외울 몫은 내게 달렸다. 물론 “Excuse me (실례합니다.)”라는 유용한 표현이 있으니 이름을 외우지 않아도 식사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이왕 알아버린 김에 그를 소피라고 부르는 손님이 되고 싶다.


소피, 이것 좀 도와줄래요?”라고 부른 찰나 동안 소피는 주문받는 키오스크보다 훨씬 존엄한 존재로 우대된다. 소피의 이름은 아마도 그의 부모가 고민 끝에 지어주었을 것이고, 친구들의 전화번호부에 소피라고 저장되었을 것이고, 길에서 ‘소피’를 외치면 소피는 돌아볼 것이다. 나는 이름을 부르며 그를 알아보고 ‘존재의 신호’를 보낸다. 물론 소피라는 고유한 존재를 제대로 알아가려면 이름을 외우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 부단한 노력과 시간이 들 것이다. 그를 소피라고 부르는 동안 우정의 가능성을 희미하게 맛본 후 소피는 배경 속으로 사라진다. 식당을 벗어나면 소피는 식당 직원 1로 삶의 크레딧에 올라가리라. 마주치는 모든 타인을 내 세계에 초대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소개하고 부르는 의례는 호출 벨의 띵동 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얼굴과 얼굴의 만남

UX 디자이너로서 나의 역할은 사용자의 대변인과도 같다. 효용과 안정성에 몰두한 개발자에게 사용자의 니즈를 설파한다. 내가 임의로 이름 붙인 페르소나(가상의 사용자를 대표하는 UX 도구)를 보여준다. 사용자 여정 지도(사용자가 제품 또는 서비스를 경험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UX 도구)를 만든다. 하지만 애써 불러보는 이 표상뿐인 사용자에 확신이 들지 않는다. 공감 방법론으로 먹고살지만... 공감을 연기하는 기분이랄까.


한 번은 개발자들을 직접 현장에 데려가 사용자를 함께 만났다. 사용자가 비로소 이름과 목소리가 있는 사람이 되는 순간이었다. “저는 컴퓨터가 어려워서 딸이 주로 도와줘요.” “어제는 이 기능을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약속을 놓쳤지 뭐예요. 제가 서툰 탓이죠.” 내가 아무리 그들을 대변하려고 한들 얼굴을 맞댄 대화만큼 효과적인 설득은 없었다. 팀은 그 후 한동안 사용자를 생각할 때마다 현장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우리에게 '얼굴'로 나타난다고 했다. “얼굴의 출현으로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나는 빗장을 건 채 빈손으로 그를 맞아들일 수 없다. 나에게 질책하고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을 대할 때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며 나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 강영안) 웃는 얼굴에 침 뱉기 어렵다는데 애초에 얼굴에 침 뱉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명백한 사람됨을 확인해 버린다. 얼굴을 바라보는 마음속에는 익명의 항의 메일과 데이터가 만들지 못한 공감의 물결이 인다.



사상검증: 더 커뮤니티

하지만 사용자의 대변인이라는 명색이 무색하게 퇴근 후 시민으로서의 나는 타자의 이름과 얼굴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붐비는 퇴근길 지하철 속 사람들이 빨리 내렸으면 좋겠고,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의 서명을 요구하는 운동가의 눈빛을 지나치며, 불쾌한 댓글을 읽으면 험한 말을 시뮬레이션한 후 신고로 심판한다. 서사와 존엄이 없는 휘발적인 교차점에서 타자를 이해하는 데 힘이 점점 부친다. 친할 수 있고 친할 수 없는 타인 중 갈수록 친할 수 없는 타인이 많아짐이 절망스럽다.


출처: 웨이브


서바이벌 예능(이라고 쓰고 사회실험이라고 읽는) 웨이브의 '더 커뮤니티'가 장안의 화제다. '더 커뮤니티'에는 절대 친해지지 못할 것 같은 12명의 출연진이 공동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살아남을 것. 하지만 '살아남는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남는 게 옳은지는 출연진이 해석하기 나름이다. 이들은 11회에 거쳐 리더를 뽑고, 공금 사용의 기준을 정의하며, 과세를 통해 작은 사회를 만들어간다. 숙의 민주주의(공공 의제에 관한 토론 과정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합의에 도달하는 민주적 절차. 출처: 두산백과)와 어그로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이 비범한 예능이 남기고 간 숙취가 깊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복잡한 출연진들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그들을 설명하는 '사상'은 각자의 방식으로 화합과 생존을 피력하는 동안 점점 모호해졌다. 나와 같은 정치적 진영에 있는 사람의 한계도 낱낱이 목격한다. 오히려 명백히 정반대인 사람을 어느덧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중반부터는 이들의 행보를 예측하길 포기했다. 그랬더니 혐오의 대상 너머 점점 얼굴이 나타났다.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한 출연진의 말처럼: "우리는 이 기준으로 절대 범주화될 수 없는, 그렇게 스테레오 타입화될 수 없는 독특한 사람들이다." (출연진 하마. 본명 하미나)


출연진은 밤마다 익명 채팅을 통해 토론에 참여한다. 토론 주제는 '데이트 비용을 더 내는 남자가 섹시하다.' '국가 발전에는 유능한 독재자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 등 자극적이고 납작하다. 익명 채팅 속 토론은 곧 짜증과 답답함이 점령하지만, 이는 곧 얼굴 없는 대화의 한계를 보여준다. 어쩌면 나는 타인을 너무 많은 익명 플랫폼에서 이렇게 납작하게만 접한 게 아닐까? 나는 왜 섣불리 이들과의 우정을 포기했을까? '더 커뮤니티'는 극과 극이어도 어울려 볼링을 즐기던 우리가 왜 채팅에서 싸우냐고 묻는 듯하다. 새로운 아고라를 상상해 볼 때다.



우정의 가능성

22대 총선 투표의 날이 다가왔다. 결과가 어떻던 익숙한 편 가르기가 언론을 장식할 게 자명하다. 정당과 진영을 잠시 뒤로하고, 투표소를 향하는 우리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다. 독선과 분노 대신 겸손과 우정을 마음에 들인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번의 투표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매일의 만남에서 이뤄질 테니. 우정의 불씨를 되살려 보겠다고 다짐하며 최태현의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가 소개한 아름다운 구절을 곱씹어본다.


그들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이어져 있기에 그들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아는 것을 차라리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미지 속에서 환영해야 하고, 그들 역시나 우리와 떨어져 있기에 우리를 환영한다.
어떤 종속성도 어떤 일화성도 없는 우정.
지극히 단순한 삶의 원리만이 들어올 수 있는 우정.
우리의 친구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그저 서로 낯설지만 서로 알아보는 우정.
<우정> 모리스 블랑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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