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bebibu Feb 12. 2024

영화를 위한 변명

2023년 개봉작을 돌아보며

바야흐로 정보의 시대다. 우리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쫓느라 바쁘고, 유튜브를 2배속으로 보며, 2배속으로 볼 시간도 없어서 AI가 정리한 요약본을 읽는다. 무한한 앎의 홍수에서 살아남으려면 시간을 달려야만 한다.


이런 시대에 왜 영화를 볼까? 영화는 길고,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고, 보다가 별로라고 멈추기도 어렵다. 영화는 더 이상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요즘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영화를 볼 시간에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는 게 낫고, 밖에 나가 노는 게 낫다. 굳이 다른 사람과 날 잡고 영화를 보자니 그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영화는 인기가 없다. '요즘 뭐 봄?'의 대화에 영화가 다시 낄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이렇게 영화가 천대받는 시대에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무려 3시간 반짜리 영화를 내놓았다. 그는 몇 년 전 마블이 극장가를 지배하는 현상을 두고 영화가 더 이상 예술이 아닌 '놀이공원'으로 변질되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진정한 '시네마'를 보여주려는 노장의 소신일까. 작년 가을 그의 <플라워 킬링 문>을 보며 3시간 반 동안 그 배짱을 오롯이 즐겼다.


판데믹 이후 차례를 기다리던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한 2023년, 좋은 영화를 많이 만났다. 영화만이 가진 특별함이 더 또렷해지는 재회였다. 회복되지 않는 극장가를 보며 영화의 종말을 예상하는 이들에게 변명해 보려 한다. 왜 영화여야만 하는지.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스틸. 출처: Apple TV+ Press



길을 잃기 위함

김영하 작가가 산문집 '읽다'에서 소개한 “고유한 헤맴”이라는 표현을 빌려오고 싶다. 그는 소설을 읽는 이유가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영화를 보는 것은 어둡고 안전한 극장 안에 웅크려 허구의 세계에서 아낌없이 헤매는 경험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인물들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울고 웃고 괴로워하고 생각의 갈피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헤맨다. 그 끝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크레딧 화면이 보이면 헤매는 동안 흘린 생각의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나가면 된다. 그리고 영화관 화장실에서 다른 관객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우리가 모두 다르게 헤맸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A는 왜 그런 거야?” “이해는 잘 안 됐는데 좋았어….” 극장 밖 세상엔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고유한 헤맴”을 품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정보화 시대의 소비자는 목표 지향적이다. 알고 싶은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콘텐츠(contents)를 섭취(consume)하며 앎의 지평을 넓힌다. 하지만 실패가 없는 매체에 길든 사람은 어슬렁거리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여기서 실패 없음은 쉽고 게으르다는 뜻이다. 좋고 나쁨이 분명하고 관객이 어슬렁거릴 기회를 주지 않는 영화엔 실패가 없다. 가장 빠르고 쉬운 길만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슬렁거리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들 덕이다. 그들은 이리 돌고 저리 돌아도 길이 되는 스케이트장 같은 영화를 찾는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그런 영화였다. 61회 뉴욕 영화제에서 Dennis Lim 디렉터는 이 영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영화가 끝나고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I couldn't stop thinking about this film)." 나 또한 마지막 장면까지 종잡을 수 없이 헤맨 후 이 불길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참 곱씹으며 겨울을 보냈다. 정식 개봉 후 다른 이들은 어떻게 헤맬지 반응이 궁금하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출처: NEOPA Fictive



그들 각자의 영화관

영화를 보지 않는 것과 더불어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 OTT 서비스의 확대로 집에서도 볼 게 넘쳐나고, 관크(관객 크리티컬: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동)는 불편하고, 영화 관람료도 너무 비싸졌다.


모종의 이유로 영화관에 찬 바람이 부는 동안 나름 호황을 누린 곳이 있으니 바로 중국 영화관이다. IMAX 상영관이 미국보다 무려 1.8배나 많은 중국은 <오펜하이머>의 글로벌 박스 오피스 성적의 큰 주축이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할리우드 제작사들은 중국 관객을 타깃하기 위해 IMAX관에서 상영하기 좋은 블록버스터 무비에 투자를 집중했다.


오직 시청각적인 체험을 위해 큰 고화질 스크린과 빵빵한 음향 시스템을 갖춘 하드웨어가 영화관의 가치라면 영화관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얼마 전 출시 된 애플의 비전 프로를 비롯해 영화적 경험을 대체하는 기술이 일상에 자리 잡게 되는 날 영화관을 향한 발길도 잦아들지 않을까. 이미 집에 장난감이 많은 아이들이 찾지 않는 동네 놀이터처럼 말이다.


오히려 영화관의 소프트웨어에 희망을 두고 싶다. "오늘 뭐 보지"를 표류하는 스트리밍 서비스 대신, 믿는 취향을 가진 전문가의 추천을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면 어떨까. 작년 나는 뉴욕 Lincoln Center에서 주최한 뉴욕 영화제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영화제는 영화를 '보는 곳' 대신 '만나는 곳'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영화 상영 전과 후에 감독과 배우 등 영화를 함께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만나고, 어디서도 공개되지 않은 영화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오래간만에 꽉 찬 극장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영화관의 생명력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본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집에서 혼자 보는 <그대들은...> 매우 다른 영화일 것이다.


61회 뉴욕 영화제 풍경

뉴욕 영화제 외에도 일 년 내내 다양한 영화 기획전이 Lincoln Center에서 열린다. 덕분에 멀티플렉스에서는 보지 못할 신인 감독의 작품과 실험적인 영화가 관객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 영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전을 소개하는 통로가 필요하다. 대형 서점의 대안으로 동네책방이 그 지역의 문화 예술 공간으로 현상하듯 고유한 기획과 철학으로 운영되는 독립 영화관의 가치가 더 주목받길 바란다. Lincoln Center처럼 역사가 오래된 독립 영화관 외에도 연희동의 라이카시네마와 뉴욕의 Metrograph 등 새로운 영화관을 실험하는 공간들에서 그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느림의 깊이

감히 말해보자면 나는 영화가 시라고 생각한다. 시에 대해 신형철 평론가가 쓰는 표현을 좋아한다:

“우리의 언어는 효율적이고 공격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으로만 예민해지는 경향성이 있다.
더 비효율적이지만, 더 아름답게, 더 깊이 있게, 문장을 공들여 적는 사람들이 시인들이다."

숏폼이 시성비(시간대비성능)에 최적화된 정보 상품이라면 영화는 점차 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2시간가량 추상적이고, 인내심을 요구하며, 당장 유용할 것 없는 이야기에 집중하라는 불친절한 요구는 시를 읽을 때 마주하는 모호함과 닮지 않았나.


시는 느린 매체다. 시는 말을 고르고 다려서 공부한 삶이기에, 시를 읽은 사람은 시와 오래도록 함께 산다. 아무렴 신형철은 "시를 데리고 살기"를 권한다. 영화도 마찬가지 아닐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데리고 살게 되는 영화다. <괴물>은 관객을 헷갈리고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깊고 분명한 질문을 한다. 섣부르게 편들지 않고 공들여 느리게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해 보는 사람은 분명 그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영화 <괴물> 스틸. 출처: Monster Film Committee


2023년 가장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바비>도 친절한 언어로 난처한 질문을 던진다. 양성 평등이라는 표면적인 주제 대신 이 영화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빌리 아일리시의 OST "What Was I Made For?"의 제목이 대신해 주는 것 같다. 남성이 주도해 온 철학의 역사에서 여성이 묻는 삶의 의미가 주목된 지는 오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왜 세상에 왔으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형과 자궁이 아닌 오직 사람으로서 내 목적은 무엇일까? 페미니즘이 그동안 얼룩진 여성의 정체성을 바로잡는 데 집중되었다면, “What Was I Made For?”는 남성이 오랜 시간 탐구해 온 존재론적 성찰을 본격적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시작해 보려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어갈 그레타 거윅의 다음 행보를 응원한다.


Billie Eilish- What Was I Made For?


단군 이래 출판계는 최대 불황이라지만 아직도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 콘텐츠가 넘쳐 나도 계속 영화를 찾는 사람이 있다. 매체는 시대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닐까. 굳세게 개봉한 아름다운 영화들을 만나며 어쩌면 지금이 영화의 가치가 재정의되는 과도기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를 놀라게 할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고 희망을 품어본다.




작가의 이전글 보고 읽고 들은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