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삶은 평범하다. 학교에 가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죽는다. 대통령이나 연예인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평등해졌다지만 한편으로 평등하게 시시한 삶을 살 운명이다.
그러나 그 평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하나하나 다른 개인이다. 같은 학교와 직장엘 다녔다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소재로 한 문학과 영화에 깊이 빠져들어, 다시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특별하다 말할 힘을 얻는다.
영화 소울은 삶을 시작하기 어려워하는 영혼 22번에 대한 이야기이다. 탄생하기 전 영혼의 세계에 사는 22번 영혼. 그는 다른 영혼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으레 발급받는 “세상을 향한 통행증”을 아직 발급받지 못한 탄생 장수생이다. 그는 통행증을 받기 위해 수많은 위인의 지도를 받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스파크가 없다.
스파크, 스파크란 무엇이었을까? 명사들은 22번에게도 삶을 살아갈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세상에서 어떤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까? 어쩌면 변호사, 정치가가 될지 모를 일이다. 훌륭한 과학자나 운동선수는 어떤가?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도 22번을 ‘살 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런 22번에게 찰나의 기쁨을 준 영혼은 주인공 조 가드너이다. 그는 22번의 다른 스승과 달리 인생에서 별다른 것을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사람으로 죽었다. 직업은 음악 선생님으로, 자신에게 강력한 몰입의 순간을 가져다준 음악이 자신의 스파크였음을 확신한다.
22번은 천국의 실수로 조 가드너와 만난 후 우연히 그의 몸에 들어가 세상을 경험한다. 가드너의 몸에 들어가 본 세상은 멋진 것들로 가득하다. 페페로니 피자와 길거리의 낙엽, 미용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22번은 이내 스파크가 어쩌면 별다른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의 스파크란 그냥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걷는게 내 스파크일 수도 있잖아. 난 걷는걸 엄청 잘 하는걸. 그런 시시한 일들이 스파크가 될 수 있을까? 조 가드너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삶의 스파크란 몰입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야. 내 인생은 음악적 성취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가드너의 핀잔을 통해 22번 영혼은 자신이 찾은 스파크가 무가치한 것이라는 생각에 빠진다. 나는 삶을 살아갈 가치가 없어. 나에게는 열정도 재능도 없는걸.
우리의 주인공 H양에게도 22번과 같은 순간이 있었다. 삶의 매 순간 발버둥쳤지만 너무나도 시시한 인생이 자신의 앞에 찾아왔을 때, 노력을 해도 더 이상 여기에서 드라마틱하게 나아질 구석이 보이지 않을 때. 그녀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이 시작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 내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삶의 데드라인을 마음 속으로 정해보았다. 서른 살에는 무언가를 이뤄놓은 사람이 되어 있겠지. 너무 빡빡한가. 요즘 서른도 한창 청춘인데, 마흔까지는 데드라인을 늘려도 되지 않을까? 그 전의 시시한 삶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시하지 않은 삶의 준비 과정일 뿐이라고 다짐했다.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삶을 비관하던 영화 속 한 영혼처럼.
H양이 삶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혼자 살 집을 구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아침에 혼자 사는 공간에서 나서 직장으로 도착했다. 저녁에는 다시 혼자 사는 어두컴컴한 그 공간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텅 빈 세상 속을 홀로 걸어가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녀는 삶을 하루하루 살아나가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쓰레기더미를 지나 버스에 올라탔다. 고요한 아침의 공기는 그녀를 왜인지 모르게 행복하게 했다. 저녁에는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시시한 글이나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어느 순간 그녀는, 어쩌면 내가 대단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도 충분한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삶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기엔 그녀의 인생이 이미 수많은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그저 통행증을 발급받은 영혼이 잠시 지나가는 공간이라면, 우리 모두에게 이곳을 사랑할 스파크를 가지고 이 세상에 왔다면, 어쩌면 지금 무언가가 되지 못한 불완전하고 초라한 인생도 이대로 받아들일만 한 것이 아닐까. 22번 영혼이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난 걷는 걸 잘하잖아. 난 환하게 웃는 데에는 자신이 있지. 아니면 중국 음식을 먹는건? 어쩌면 중국 음식이 내 스파크였는지도 몰라. 마침내 어느 순간 그런 시시한 건 사는 의미가 될 수 없다며 핀잔을 일삼던 내면의 조 가드너가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삶이 왜 비극의 텍스트인지를 논하려 한다. 텍스트는 시간을 거쳐 읽히는 매체다. 이미지와 달리 결과물을 단시간에 내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이야기를 길고 길게 써 나가는 것.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읽는 순간을 즐기기 만드는 것. 우리가 인생을 돌아볼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한 줄의 비극적인 문장일지 모른다. H양, 85세의 나이에 병환으로 사망. 그러나 비록 삶의 끝에 문장 하나만이 남는다 해도, 우리는 꾸준히 정해진 엔딩을 향해 이야기를 쓴다.
H양, 1990년 어느날 성모병원에서 탄생.
H양, 2074년 어느날 병환으로 사망.
이 두개의 문장 사이에 분명 화려한 이력을 넣을 수도 있다. 변호사 시험 합격. 연봉 1억 달성. 포브스 선정 젊은 기업가 30인에 선정. 인스타그램 팔로워 50만명 달성.
그러나 또 다른 문장을 넣는 것도 본인의 선택이다. 아림 7시 03분 버스를 타고 출근. 저녁에는 샹송을 들으면서 하루를 마무리. 사람들 앞에서 밝게 웃음. 맛있는 중국음식을 먹음.
어느 따뜻한 퇴근길, H양은 문득 자기 안의 통행증이 반짝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지러운 거리 안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음식을 먹고 친구를 만나는 목소리가 거리를 채웠다. H양은 자신이 내는 구두의 소리와, 상점의 어스름한 불빛과, 노란색 저녁의 공기를 느꼈다. 그녀의 삶은 또다시 문장 하나를 써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