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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Jul 20. 2023

5. 이런 내가 속물일까?

까만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었다. ATM 기계는 1층에 있었다. 5만원, 아니면 10만원? 그래도 옛 정을 생각해 10만원을 인출하기로 했다. 오늘은 대학 동기가 결혼하는 날이다. 


H양은 결혼식에 참석하는 걸 극도로 귀찮아했다. 주말 오전에 일찍 일어나 궁금하지도 않은 타인의 경조사를 축하하는 일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결혼하려는 마음이 딱히 있지도 않았다. 내가 뿌린 이 축의금 중 절반이나 돌아올까. 허무한 생각이 올라왔지만 인스타용 사진을 찍는 데서 위안을 삼기로 했다. 봉투를 들고 3층 계단을 오르자니 다리가 저렸다. 아무래도 운동 부족이란 말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집에서 요가 비디오를 따라하는 걸로는 무리가 있었나. 


결혼식에는 꽤 많은 대학 시절 동기들이 참석했다. 취직 이후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는 건 간만이었다. 다들 어떻게 지내? 아 나는 취직하면서 자취 시작했어. 나도 너무 나가고 싶은데 부모님이 절대 못 나가게 하신다니까. 하나마나 한 쓰잘데기 없는 소리들. 그 순간 등 뒤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얼마만이야!!" 


요란스레 등장한 이는 최근 소위 말하는 신의 직장에 취업한 S였다. 딱 맞는 자켓을 입어 근육질의 몸매가 더욱 부각되는 듯 했다. 학부 3학년 때 Y대로 편입한 이후 소식이 잠잠하더니, 취업에 성공하고는 간간히 얼굴을 비추고는 했다. 약 1년 만에 만난 그는 학부 시절보다 꽤나 좋아 보였다. 눈빛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피부는 반질반질했다. 저 정도 근육이면 계단은 쉽게 오르겠네. 그는 완벽히 손질된 앞머리를 살짝 건드리며 대학 동기들의 근황을 물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각자 회사 생활은 어떤지. 자기 회사의 선진적인 근무 문화에 대한 디테일을 은근 슬쩍 섞어 근황을 전하는 그에게서는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그래서 H는 남자친구 없어?” 


어느새 화제는 H 본인의 남자친구 유무로 전환되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 아니 취업하고 한번도 없었단 말이야? 그는 돌연 이래선 안된다며 조건에 꼭 맞는 남자친구를 찾아 주겠노라 호언장담했다. 원하는 조건? 굳이 없는데. 굳이 꼽자면 구릿빛 피부에 로맨틱한 눈빛을 가진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그런거 말고 학벌이나 뭐 수입이나 이런 조건 없냐는 말이야. 그래도 네 수준에 맞는 남자가 필요한 것 아니야?” 


내 수준? H양은 초봉 3천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 여덟이니 위 아래로 두세살 정도면 괜찮을 듯 했다. 4년제에 되도록이면 서울 소재 대학교 출신. 수입은 비슷하거나 더 높은게 좋을 것 같아. 차 혹시 있어야 해? 이 친구가 성격은 진짜 좋은데 차가 없어서.. 


H는 순간 도마 위에 올라간 횟감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이/수입/얼굴/부모님의 재산 유무. 곰곰이 생각해보니 구릿빛 피부나 로맨틱한 눈빛 보다는 정량적인 조건이 더 중요한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정량적인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않은 자신이 볼품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내가 키가 158cm가 아니라 167cm 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나에게 183cm의 남자가 주어졌을까? 내 초봉이 3천만원이 아니라 5천만원 이었다면, 우리 부모님이 서울 출생의 노후 걱정 없는 사람들이었더라면 내 등급이 조금이라도 올랐을까? 마치 도마 위 물고기가 자기 육질이 쫄깃하지 못함을 한탄하듯, 그녀는 전신 거울 앞에서 배를 부풀렸다 집어넣었다 하며 몸매도 혹시 조건에 들어가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H양은 그날 속물의 세계를 마주했다. 모두가 자신에 맞는 등급을 부여받는 사회. 속물들은 사람의 본질적 가치가 사회 속 위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 세계는 공평해 보였다. 상위 10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그 밑에 있는 사람을 만나선 안 된다. 그건 손해이기 때문이고, 인생에서 절대 손해를 볼 수는 없다. 끼리끼리 만나라. 인생에 손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말아라. 그곳은 안온하고 어쩌면 정답인 것 같은 길을 내밀었다. 개인의 내면에서 나온 생각 - 예를 들어 H양이 최근 침대를 퀸 사이즈로 바꾸며 느꼈던 기묘한 희열 같은 일화는 - 대단히 하잘것없게 취급되었다. 


그녀는 분명 오늘 자신의 수준이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들었음에도 기분이 좋질 않았다. 아마 지금까지 인생에서 써내려간 문장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했으며, 읽으려 들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S의 기준 안에서 특정 등급에 위치해 있었다. 등급은 그녀가 살아오며 써온 문장과는 관계가 없었다. 뭣이 중하였는지? 그녀가 어떤 대학을 졸업했는지, 수입은 얼마인지, 얼굴이나 몸매가 남자들이 판단하기에 몇 점인지와 같은 정량적 요소가 중했다. 


그러나 아무럼 어떻단 말인가? H는 S의 정돈된 앞머리와 꽉 맞는 자켓을 떠올렸다. 스펙 좋고 번듯한 남자와 함께 성수동을 거니는 주말도 멋질 것 같았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게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녀는 오늘 느낀 기분나쁨이 아마도 자격지심일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요즘 운동을 통 안했더니 부정적인 기분이 올라와서일 거야.


그녀는 초보자를 위한 40분 요가를 따라한 뒤 개운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띠링.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소개받기로 한 K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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