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일리 Apr 29. 2024

6. 저는 적금 따박따박 드는 여자가 좋아요

하얀 셔츠에 까만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약간 비치는 검은색 스타킹에 너무 싼티나지는 않는 가방. 뾰족구두를 신는 건 너무 오버스러우려나.  오늘은 S군이 주선한 소개팅이 있는 날이다. 서른 셋에 사업하는 남자로, 매출이 월 억대로 나온다 했다. 외국 유학파에 키는 190cm, 얼굴도 사진상으로 봐서는 나쁘지 않았다. H는 S가 소개팅을 주선해주며 건넨 말을 말을 머릿속에 새겨 보았다. 너 정도 조건에 이 정도 사람 만나기 쉽지 않아. 확실히 좋은 조건이었다. 약간 움츠러들 정도로. 아니야, 주눅 드는 순간 지는거야. 그녀는 자존심 충전을 위해 자신이 무대 위에서 뭇 남성의 선망을 받는 아이돌 스타라고 상상했다. 다리를 쭉 뻗고, 어깨를 곧게 펴야지. 그녀는 오늘 입을 옷을 고르느라 엉망으로 만든 바닥을 살금살금 지나쳐 현관을 나섰다.


약속장소는 집 앞 커피숍이었다. 주차가 잘 되기에 여기가 편하다고 했다. 차가 있단 말이지. 어떤 걸 탈까? 자꾸만 그의 재정 상태를 상상하게 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하얀색 벤츠의 조수석에서 한남대교 너머를 바라보는 자신을 상상했다. 아 이래서는 안되는데. 그러나 뭐, 안될 건 또 뭐가 있는가? 사랑은 원래 총체적인 것이다. H는 벌써 만나지도 않은 남자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논쟁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저 2층에 있습니다.


메시지 창에 알림이 떴다. 계단을 오르자 키가 180cm가 훌쩍 넘어 보이는 거구의 실루엣이 보였다. 유행이 한참 지난 듯한 두께감에 발목 부분이 꽉 끼는 듯한 청바지. 엉덩이 부분이 약간 노랗게 워싱 되어 있는 전형적인 70년대 스타일이었다. 듣기로 90년대생이라고 했는데. 벌떡 일어나 악수를 하니 그의 두툼한 뱃살 부근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이사람이 아니라고 빌기엔 너무 사전에 들은 정보와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H는 짧은 숨을 헙 들이마시고 사회적 미소를 장착했다. 


안녕하세요, 저 혹시 소개팅..?


아 네 맞습니다! 반가워요. K라고 합니다. 커피 괜찮으시죠?


그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에 올려둔 가방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디올의 시그니처 회색 문양이 어지럽게 반복되는 얄쌍한 클러치였다. 돈이 많길 바랬지만 저런 물건을 사는 사람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비싼 클러치 위의 고급스러운 문양과 로고가 야속했다. 그는 클러치에서 카드를 꺼내 5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계산한 후 흔들거리며 계단을 다시 올랐다. 


안녕하세요. 저는 월 매출 억대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xxx 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앉아있는 카페처럼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이 비즈니스에서 꾸준히 수익을 내고 정착할 수 있도록 프로모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요. 혹시 xxx 떡볶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제가 얼마 전에 그 회사 담당 했었거든요.


아, 네 반갑습니다. xxx 떡볶이요, 들어본 적 있어요.


들어본 적 없었다.


제가 너무 초면에 제가 하는 일 얘기만 하나요? 그래도 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소개팅 나온거잖아요 우리. 서로 연인을 찾고 있는 거니까 이런 측면에서 맞춰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다시 프랜차이즈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다시?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을 나타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함께 만나는 여성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듣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사장님들이 어떤지 알아요? 대부분 빨리 돈을 버는거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그 사장님들 상대할 때가 항상 고역이죠. 그래도 사업이라는게 오롯이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거니까 더러운 꼴도 참아야하는 것 아니겠어요? 예전에 한번은 핫도그 가게 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은 정말이지..


H는 순간 한남대교와 벤츠를 상상했던 자신을 한대 치고 싶었다. 도대체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어차피 자기 주제에 대단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는 만날 리 없는 이 남자에게 나쁜 후기를 듣고 싶지 않은게 아이러니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흰 티셔츠와 청바지에서 이미 "저는 센스쟁이 남자를 원합니다" 라고 선언한 후 일어나야 마땅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 열등감 및 주선자에 대한 한줌의 예의가 그녀의 엉덩이를 계속 끌어내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사랑도 쟁취할 수 있어. 그래도 돈 많은 남자인 것으로 보이니 일단 저 사람의 호감을 얻은 후에 뭐라도 생각하자. 마치 스스로 욕망해서는 안되는 사람처럼 H는 입꼬리가 부들거리는 걸 참으며 그 남자의 돈 및 사업자랑을 듣고 있었다. 


아 맞다, H양은 어떤 일을 하신다고 하셨죠? 


소개팅이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 H양에게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H: 저는 자동차 부품 수출하는 일을 해요. 

K: 오 정말요? 외국으로 수출하시는거에요? 엘리트시네. 

H: 아뇨 그냥 물건 떼와서 파는 일 하는거죠 뭐.

K: 아 xx 주식회사 다니신다고 했죠. 그 회사 주식 엄청 올랐던데 요즘에. 

H: 맞아요 그렇긴 해도 저는 주식은 잘 못하겠더라구요. 돈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요. 

K: 주식 안하시는구나. 제테크 잘 못하시죠? 그냥 적금만 드는 스타일? 

H: 네. 돈관리 어떻게 해야할지 사실 잘 몰라서.. 그냥 적금만 넣고 있어요. 

K: 제가 원하는 배우자상이네요. 저는 적금 따박따박 드는 여자가 좋은데. 


적금 따박따박 드는 여자. 오늘 받은 이름이었다. 그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것을 자랑스럽에 여겨야 할까? H는 자신이 모르는 돈의 세계를 조금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K 앞에서 약간 작아지는 마음을 느꼈다. 그는 마치 칭찬하듯 "저는 이런 여자가 좋은데"라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에 비해 부족한 지식을 가진 상대를 낮추어 보는 시선이 깔려 있는 듯 했다. 결국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놓고 약 두 시간 반의 소개팅은 끝이 났다. 사업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던 그는 디올 클러치를 손에 쥐고는 "그럼 다음에는 술 한잔 해요!"라며 자리를 떴다. 다음의 술 한잔이 없을 것이란 사실은 그도 H도 알고 있었다. 


초여름의 밤공기가 달콤했다. 인근 한강공원으로 나가니 최근 대형 건설사가 지었다는 빨간색 기둥의 건물이 우뚝 솟은 모습이 보였다. H는 핸드폰을 꺼내 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오늘 자신은 어떤 여자여야 했을까. 적금이 아닌 주식 따박따박녀였으면 조금 나았을까? 몸매 날씬날씬녀. 아니면 집안 부자부자녀는 어떤가? 문득 지방에서 자신의 대학교육을 뒷바라지하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이, 뭐 어때. 그녀는 달을 줌인하는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웃기게 느껴졌다. 촌스러운 사업가한테 차였다고 별 청승을 다 떠네. 집에가서 바닥청소나 해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