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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Apr 18. 2022

완벽한 자취방을 구하기 위한 조건

용산에서 합정까지

조건을 얘기해주시면 알맞은 매물을 찾는데 도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익숙한 알림음에 파란색 메시지가 떠올랐다. 커서는 대답을 기다리듯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 구석에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원하는 매물의 조건을 적어내려갔다.


보증금은 x만원에 월세는 x만원 정도까지 가능합니다.

평수는 7평은 넘었으면 좋겠고 주차가 가능해야 합니다. 반려동물은 없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은 안됩니다.

너무 언덕에 있지 않고 평지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매물 있으면 연락 주세요.


나는 지금 자취방을 구하고 있다.


필터 내용은 저의 예산과 관계 없습니다

2년간 살던 회사 기숙사 기간 만료가 임박했다. 상경한 후 약 10군데의 방을 거쳐갔지만, 특정 단체에서 제공하는 숙소가 아닌 내 예산으로 집을 구하는 것은 두번째였다. 3주간 집을 구하러 다니며 첫 자취방을 구하던 그때를 많이 떠올렸다. 처음 방을 구한다는 설렘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그때, 나는 두번째로 방문한 부동산의 세번째 집을 계약했다. 월세 3만원을 깎아주겠다던 중개인의 말에 다급히 가계약금을 송금한 후, 그 다음주부터 학교 선후배들과 이삿짐을 날랐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건 중개인과 집주인이 세입자를 빨리 구하기 위해 항상 사용하는 수법인 듯 하다.


직장인이 되어 구하는 방은 대학생 시절 구하던 자취방과 많이 달랐다. 우선 학교 앞에만 머무르려 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어느 곳에 방을 구해도 상관이 없었다. 출퇴근에서 생기는 불편함을 감당한다면 서울 뿐 아니라 경기도 외곽에 산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월세도 보증금도 순전히 다 내가 조정하는 것이었으므로, 다른 어느 누구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선택권이 주어지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는 거였다. 직장은 서울역 근처에 있었다. 그렇다면 서울역을 중심으로 집을 보러 다녀야 할까? 지하철 3-4 정거장 옆은 어떤가? 1호선이나 4호선이 아니더라도 그냥 내가 살고 싶었던 동네를 보러 간다면 어떨까? 수입의 얼마까지를 월세 혹은 전세 이자로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은 학생일 때 잠시 머무를 자취방을 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을 해야만 했다. 그것은 단순히 어디에 살 것인가를 넘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와 관련한 질문이었다. 나는 얼마를 버는 사람인가? 얼마의 돈을 낼 수 있는가? 어떤 동네의 어떤 집에 살기를 원하는가?


처음 찾아간 곳은 용산 후암동의 1억 8천짜리 쓰리룸이었다. 전세 1억 8천만원에 쓰리룸,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주소지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차로 한시간이 넘게 달려가 부동산 중개인과 살펴본 집의 외관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것이 주거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 외관 안에는 세입자의 처절한 노력으로 그곳을 집다운 집으로 만들려 했던 공간이 늘어서 있었다. 비가 새는 천장은 수리해 주겠다는 중개인의 말에 따로 대꾸를 해줄 기운이 나지 않았다. 비슷한 금액대의 다른 방은 없나요? 중개인은 용산 집 전세가가 대부분 2억을 넘는다고 했다.  


그전까지 네이버 부동산과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로 나름의 아이쇼핑을 즐기던 나는, 그 중개인의 말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가 최대치로 잡은 예산인 전세 1억 8천짜리 집이 저정도라니, 이대로라면 정말 원하는 집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닥치는대로 네이버 부동산에서 찜해둔 매물의 부동산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용산에서 합정까지, 서대문구와 마포구를 가로지르는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래서 얼마까지 가능하세요?

나도 몰랐던 나의 조건


부동산을 다니다보니 내가 이제까지 얼마나 애매모호한 태도로 살아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개인은 크기가 중요한지, 가격이 중요한지, 채광이 중요한지를 물었다. 주차는 꼭 하셔야 하나요? 혹시 관리비 포함해서 70만원까지는 어떠세요? 집을 구하던 첫번째 주말에는 그 모든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크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좀 넓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하면 중개인들은 그 크기가 얼마까지라는 것인지 헷갈려했다. 해는 잘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나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어두컴컴한 집을 보러 다녀야 했다. 그 이후 대충 살 곳이 아닌 마음에 드는 자취방을 구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조건이 아주 명확해야 한다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조건은 단순히 방의 크기 혹은 일조량을 넘어 주변 환경, 건물의 노후도, 베란다의 유무 등 굉장히 많은 내용을 포함했다. 그렇게 나는 주차는 꼭 가능하지 않아도 된다며 중개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던 모습에서 벗어나, 주차는 반드시 필요해요, 라고 명확히 이야기하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곳에 대한 조건을 정립하는 일이 아주 쉬울지 모른다. 원하는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만큼 돈이 많거나, 자기의 욕망을 모두 알아챌 만큼 기준이 명확하면 모든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가진 돈에 맞춰 자신의 조건을 조절한다. 마음 같아서야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싶지만, 앞으로 그런 욕망이 충족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때문에 자신의 욕망 중 가장 중요한 욕망을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종의 선별 작업이다.


나는 집을 알아보며 몰랐던 내 욕망을 여럿 알게 되었다. 우선 생각보다 나는 동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집이 괜찮아도 너무 골목이나 언덕에 있으면 일단 살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주변에 좋은 카페나 서점이 많아 보이면 집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포인트가 올라갔다. 최종적으로 합정에 살기로 결심한 이유도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누군가는 환상에 가득한 선택이라고 핀잔을 줄지 모르겠으나, 결국 그 욕망에 충실히 살아가며 책임지는 주체는 나 자신이기 마련이다. 자기가 좋은 동네에 살고 싶으면, 결국 어떻게 해서든 좋은 동네에 살게 된다.


둘째로 나는 집 외관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각종 어플로 매물을 확인할 때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집이 들어선 건물의 상태이다. 나는 굳이 최신식 오피스텔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주거지의 모양을 한 거주지를 원했다. 가건물처럼 무언가 집의 느낌이 나지 않는 건물에서는 안전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최신식 오피스텔에서 월세를 낼 형편은 되지 못했기에, 나는 빨간 벽돌 주택에 최종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

동네 부동산을 모두 섭렵하기


집을 구할때 가장 크게 했던 실수는 동네를 확정하지 않고 부동산을 돌아다녔다는 거였다. 학교 앞 자취방을 구하던 그때만큼의 확신도 없이 집을 구하다보니 나는 3주 내내 체력적으로 지쳐있었다. 아무리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도 인천 사람이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와 집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주간 주말마다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지며 원하는 후보지의 부동산을 계속해서 탐방했다. 내가 살고 싶은 동네에 대한 확신이 서지도 않은 채 말이다.


인터넷 사이트나 대형 부동산 어플리케이션이 잘 갖춰져 있는 시대이다보니, 인터넷 상의 정보를 믿고 동네를 가로지르며 집을 구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전략이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집주인들은 대형 부동산보다는 동네 부동산에 매물을 내놓는 일이 많기 때문에, 부동산과 관련해서는 대형마트보다 영세 슈퍼마켓이 더 질 좋은 물건을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좋은 것은 주말 오전부터 동네를 도보로 돌아다니며 모든 부동산에 방문한 후 연락처와 조건을 남겨 두는 것이다. 핸드폰으로만 연락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동네 부동산의 놀라운 점은 바로 부동산끼리의 일종의 연맹(?)을 맺고 있다는 거였다. 나에게 찾아온 손님이 원하는 조건을 이야기했는데 마땅한 집이 없을 경우, 부동산끼리 서로 연락을 주고받아 이사람에게 맞는 매물을 찾아봐주고 있었다. 실제로 나도 이렇게 마음에 드는 집을 몇 건 발견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동네엔 부동산이 많고 집에 대한 정보도 완전히 오픈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동네 부동산에 의지하여 몇주 간격을 두고 집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해본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집과 연애의 상관관계


처음 집을 보러 다녔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예산이었다. 보증금 이정도에 월세 이정도인 집에 들어가서 맞춰 살아야지.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아무리 방이 작아도, 동네가 별로여도, 결국 우리는 나름대로 마음에 들어야만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다. 되는대로 사서 쓰는 물건과 달리 집은 내가 선택하는 유일한 공간이자 나의 쉼터이기 때문에, 주관적인 집에 대한 만족도가 꽤 중요하다.


3주간의 집을 찾는 과정이 연애를 하는 과정과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할 때 여러 조건을 내세우지만, 막상 그에 맞는 사람을 찾아 연애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조건에 모두 부합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딘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게 된다. 집을 구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결국 여러 조건을 뛰어넘어 선택한 집은 그냥 어떤 느낌적인 느낌이 좋은 집, 내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살아갈수록 단점을 발견하겠지만 어쩌랴, 이제 나는 이 집을 책임져야 한다.


어디서 살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


줄곧 어떻게 하면 내 삶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는 했다. 남이 정해준 일을 하며 남이 차려준 밥만을 먹으면서, 줄곧 나의 온전한 것을 꿈꿨다. 조그만 방 하나를 세 얻어 살아가는 과정은 인생을 나의 것으로 꾸려나가는 그 처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곳, 그리고 우리가 하는 것. 어디서 살 것인가,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두가지의 질문이다. 


꿈속에서 그 두가지 질문에 답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난 2층 집에서 살거야, 마당도 있어. 여기가 거실, 여기가 안방. 애는 둘 정도 낳을 거고, 개도 키울 거야. 대따 큰 걸로. 꿈같은 얼굴로 서툴게 그림을 그리던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그녀는, 10년 후 남편의 위자료를 가지고 술주정을 해댄다. 화려하고 안락하고 탁 트인 그 모든 것을 원하던 우리의 꿈은 쉽게 좌절된다. 그 자리에는 현실에 발을 딱 붙인 초라한 예산과 포기해야 하는 많은 조건들, 그리고 당신 예산에 이정도 집이면 훌륭한 거라는 중개사의 말에 속지 않을 만큼의, 딱 그만큼의 자존심만이 남는다.   


나는 7평짜리 원룸을 계약하며 첫사랑에 빠지던 영화 속 그녀처럼 10년 후의 내 집을 상상해 보았다. 볕이 잘 드는 바닷가 근처의 집을 사야지. 거실에는 피아노를, 화장실에는 욕조를 놔야지. 베란다에서는 글을 쓰고 책을 읽어야지. 아마도 나의 상상은 전혀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어딘가는 불완전하고 사랑스러운 내 집이 있지 않을까.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껴안아줄 어딘가, 가끔은 술주정을 해대도 나를 받아줄 어떤 장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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