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난 Mar 15. 2020

춤과 글쓰기

멋부리지 마라

상체의 윤곽이 비치는 하얀색 저고리와 옅은 녹색의 풀치마를 입는다. 실핀으로 머리카락을 고정시켜 단단히 묶고, 풀 먹인 버선을 신는다. 탈의실 문을 열고 연습 홀에 들어가 오래되어 삐걱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을 보며 고개 숙여 걷는다. 거울 앞에 선다. 우두커니 선 나를 본다. 춤을 시작하기 전 매번 긴장되었다. 선생님이 장구로 장단을 시작하면 기본기 춤을 시작했다. "호흡이 짧다", "물에 손을 넣었다 생각하고 손목을 써", "굴신이 얕다" , "고갯짓 경망스럽게 말고" "멋부리지 마라". 선생님의 꾸중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춤은 리듬이 중요하다. 리듬에 쫓기는 사람은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사람이다. 리듬을 타는 사람을 춤을 그럭저럭 추는 사람이고, 몸으로 리듬을 주도하는 사람은 춤을 잘 추는 사람이다. 같은 동작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재단된 리듬을 몸에 새겨야 한다. 서양의 무용이 리듬의 길이를 늘렸다가 줄이는 것이라면 한국 무용은 리듬의 부피를 조이고 풀어야 하는 모양새이다.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을 배웠다. 가장 좋아했던 것은 한국무용 그중에서도 전통무용이었다. 넘치는 법이 없는 정갈한 선이 좋았다. 과시하지 않아도 멋스럽고, 단순한 듯 보여도 유려하고, 적극적이지 않아도 절절히 동하는 춤이다. 휘몰아치는 장단 속에서도 격정에 지배되거나 엉키지 않는 춤사위다. 팽창하는 호흡을 머금고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춤 춘다. 전통음악은 거세게 밀어붙이는 날 것의 장단이 있다. 나는 장단에 압도되어 주눅 드는 그러니까 춤을 잘 못 추는 사람이었다. 본능적으로 리듬을 읽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 몸이 리듬을 찾기 위해 애썼다. 발바닥을 지그시 누르고 띠울 때를, 멀리 두었던 시선을 거둘 때를, 머금었던 가슴의 호흡을 어느 때에 뱉을지를 계산했다. 수많은 계산들에 얽매였다. 산란한 리듬의 질서를 찾았던 것 같은 찰나, 몸으로 몰입하여 계산과 긴장 없이 춤을 추던 그 찰나를 잊을 수 없다.





글도 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동작과 동선을 엄격하게 체계화하여 압도적인 미를 창조하는 '발레'와 닮은 글이 있다. 글의 전개가 매끄럽고 촘촘한 논리가 돋보이는 글이다. 제약 없는 움직임과 모든 의도에 열린 접근을 하는 생경한 미와 추가 담긴 '포스트모던댄스'와 닮은 글이 있다.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모를, 또렷하거나 확정적이지 않는 단어들에 집중하게 되는 글이다. 의미를 찾는 재미가 있다. 들숨과 날숨이 춤이 되어 정적이고 정밀한 미를 가진 '전통무용'과 닮은 글이 있다. 문장 사이의 호흡이 있고, 활자 밖의 공간이 읽힌다. 잔잔히 서사를 전개하지만 '울컥'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글이다.

작가는 그가 느낀 슬픔, 분노, 회의, 기쁨, 환희와 같은 농밀한 감정이 이는 지점을 날카롭게 찾아낸다. 마음이 동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말하지 않고, 감정의 지점을 담백하게 언어화하는 작가가 좋다. 특히 정갈하고 맑은 문장으로 격정적인 감정을 의연하게 다루는 글이 좋다. 전통무용의 리듬과 닮았다. 수려하지 않은 문장이지만 무게감이 있고, 폭발할 듯 팽창한 에너지가 있지만 결코 터져버리지 않는 글에 몰입된다. 이것저것을 과장되게 노출하고 화려하게 뽐을 내는 글들은 감탄은 하지만 감동은 없다.

작가의 문체 혹은 글의 뉘앙스라는 것은 '춤의 리듬'과 같을지 모른다. 작가의 리듬이 선명히 읽히는 책을 읽으면 작가의 처참한 노고도 함께 떠오른다. 지독하게 찾았을테고 끈질기게 몰입했을테다.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는 몰입하는 순간을 매번 제 발로 걸어 들어갔을 작가들에 경의가 표해진다. 리듬을 가지고 싶다. 리듬이 읽히는 글을 한 번이라도 써보고 싶다. 보다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춤 선생님이 가장 호되게 꾸짖었던 말이 기억난다. "멋부리지 마라." 과시하고 싶은 마음과 작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글밥은 독서로부터.
작가의 이전글 생각이 많은 사람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