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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Feb 22. 2020

순조롭지 않은 결혼

<제 2의 성>_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복 많은 년..?


친구들 사이에서 '세상 부러운 년'이라 분류되는 대상이 있다. 아버지, 시댁, 남편으로부터 경제적 시혜를 받아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영위하는 일부 여성들이다. 든든한 후견인을 가진 그녀들을 '년'이라는 비속어를 붙여 폄하한다. 질투심의 발로이다. 무위도식하는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을 비난하지만 사실은 그녀가 가진 특권을 선망한다.

 근래 만난 사람 중 인상 깊은 사람이 있다. 능력 있는 남편과 그보다 더 능력 있는 시댁을 두었다. 시댁 어른이 "네가 버는 푼돈 내가 줄 테니까 집에서 살림과 육아만 해라" 명했고, 따랐다고 한다. 살림은 가사도우미가 하고 아이의 교육에 주력하며 사는데, 교육비로만 20억을 예상한다고 편하게 얘기할 만큼 경제적 제약을 받지 않는 듯했다.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혼을 하면 내가 누리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지원 없이 산다는 게 막막하고 두려워요."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얘기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그녀를 보며 적잖게 당황했다. 자신의 허약함과 무능과 허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위선보다야 낫고, 본인의 안위를 위해 실리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두고 비도덕적이라 할 수도 없었기에 "음.."이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누리는 경제적 혜택과 맞바꾼 것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을까. 남성의 부와 권위에 편승하는 것을 즉 예속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택한 여성의 삶을 저속하다고 봐야 할까. 시몬 드 보부아르 가 말한 '스스로 자기의 목적을 찾아야 할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성찰, 실존적 고민을 굳이 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 그녀 앞에서 보인 끄덕임 뒤에 많은 의문이 일었다.


'타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남자와의 공모를 거절하는 일은, 여자들에게는 상층계급인 남성 사회가 자기들에게 부여할지도 모르는 이익을 단념하는 일이 된다. 영주인 남자는 가신인 여자를 물질적으로 보호해 주고 그 삶의 도덕적 정당화를 책임진다. 그러므로 이 경우 여자는 경제적 위험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목적을 찾아야 할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위험도 회피할 수 있다. 24p
 



죄 많은 년..?


그녀에 비할 바 못되겠지만 나도 시댁의 지원을 받았다. 시어머니는 밑천을 크게 떼어내 집을 마련할 자본을 주셨다. 어머님의 아들은 시혜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밑천을 떼어 준 건지 명확하게 아는 듯했다. 남편의 불성실한 가사 육아 참여를 조목조목 따지자 "우리 엄마가 왜 돈 준 줄 알아? 나 편하게 살라고 준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자본이 가정 내 위계질서를 세우는데 훌륭한 수단이자 근거가 된다고 여긴 남편은 살림과 육아를 내게 전담시키고도 당당했다. 남편만큼 두둑한 밑천을 떼어오지 못한 나는 직장을 다니며 육아와 살림을 도맡았다. 응당 갚아야 할 빚을 갚는 심정으로 몸으로 때워 일했지만 내 노동은 경제적 환산이 되지 않았다. 울분이 쌓여갔다. 나는 결혼 전 '결혼 후 현실'을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릎을 꿇고 다이아 반지를 내미는 남자가 뱉은 사랑의 맹세를 천진스럽게 믿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남편이 가져온 시댁의 부를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그 대가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그저 안정적인 상태에 몸을 누이고 싶었다. 나는 내게 경고했어야 했다. 시댁의 돈을 수락하는 것은 나를 지긋이, 교묘하게, 꾸준히 쥐어짜서 결국 착취당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르는 일이라 경고했어야 했다. 비장한 각오 없이 타인의 부와 권위에 편승하는 것은 위험하다. 타인과 본인이 스스로를 고약하게 대해도 참아낼 의향, 지고지순한 순종과 지극정성의 봉양을 할 의향, 열등한 지위에 머무는 것에 만족할 의향이 있어야 한다.

 남편은 "남녀는 평등하지. 나는 페미니스트인 아내를 지지해"라고 말하면서도 "난 남자니까 살림과 육아가 천성에 맞지 않아."라고 하거나 "나 때문에 (우리 엄마 돈 때문에) 네가 안락한 삶을 사니 사소한 노력은 네가 좀 해주라"라고 하거나 "좀 더 여자다운 미덕을 가진 부인이 되어주면 안 돼?"라고 말한다. 부부는 그 어떤 사회적 관계보다 견고한 권력형 관계이다. 고도의 성 전략이 난무하는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지고, 경제력을 무기로 쥐고 상대를 찍어 누리는 권력형 폭력도 비일비재하다. 나는 여자인 데다가 밑천까지 없었으므로 시작부터 열세했다.

지배계층은 그들을 '알맞은 지위', 즉 자기들이 선택해준 지위에 머물게 하려 한다. 이 두 경우에서 지배계층은 어린애같이 잘 웃는 '선량한 흑인'이나 '순종적인 흑인'의 미덕에 대하여, 그리고 경박하고 유치하며 무책임한 '여자다운 여자'와 남자에게 '순종하는 여자'의 미덕에 대하여 꾸준한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_27p




'복'도 '죄'도 바라지 않아.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불평등 한' 관계의 끝에 위태롭게 서 있다. 고정되어 있는 열등한 지위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남편의 부당함에 응수하려 했지만 매번 성과 없는 감정싸움으로 끝이 났다. 설움에 복받치지 않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장 큰 문제는 상대를 납득시킬 언어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말하고 싶은 것들은 많으나 말할 수 없는 난관에 수없이 봉착했다.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한 탓에 무엇이 부당하고 왜 부당한지 명확히 알지 못한 까닭이었다. 나를 '주체'로 삼고 내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 '실존적 고민'이 부재한 탓이기도 했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남성 의식 슬하의 제도 안에 진정으로 인사이더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남성에게서 종속된 여성의 위치를 해방시킨다는 의미보다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으로서의 나’로부터 해방되어 '실존적 나' 란 무엇인지 의문하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한 '스스로 자기의 목적을 찾아야 할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위험'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여겼던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일이고, 그 당연함을 경계하는 일이다.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라고 했다. 실존적 고민은 무익하지 않다.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나를 지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남편과 나와의 관계에서 내가 소외되지 않고 평등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언어를 습득하게 도와준다.

 나도 그녀가 말한 것처럼 시어머님의 지원이 환수된다면 막막하고 두렵다. 내가 누리는 경제적 혜택과 맞바꾼 것을 환수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받기를 거부하고 주기를 거부하는 관계가 지속될 수 없고, 경제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성차별의 객관적 부당함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나의 약함이나 나의 열악한 상황에 주저앉아 있지 않기로 한다. 안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고, 알기 때문에 감수할 것들이 늘어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더 알고 싶다. 나는 내가 존엄한 주체이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존엄한 주체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더욱 고민할 것이다.
 
나를 나로부터 소외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제2의 성> 프롤로그 中

'타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남자와의 공모를 거절하는 일은, 여자들에겐 상층계급인 남성 사회가 자기들에게 부여할지도 모르는 이익을 단념하는 일이 된다. 영주인 남자는 가신인 여자를 물질적으로 보호해 주고 그 삶의 도덕적 정당화를 책임진다. 그러므로 이 경우 여자는 경제적 위험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목적을 찾아야 할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위험도 회피할 수 있다. 사실 자기를 사물화 하려는 유혹 또한 모든 개인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길이다. 왜냐하면 수동적이고 소외되고 자기를 상실한 사람은 초월에서 이탈하고 모든 가치를 상실하여, 다른 사람의 의지의 제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편안한 길이기도 하다. 그 길에서는 저마다 마땅히 감수해야 할 실존의 고뇌와 긴장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를 '타자'로 만들어 버리는 남자는 여자 속에서 뿌리 깊은 공범 기질을 발견한다. _24p

봄에 시작해서 겨울에 끝난 <제2의 성>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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