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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Aug 27. 2020

남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기술_ 에리히 프롬 지음

사십 줄에 다시 시작하는 사랑 타령.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문제로 생각한다." (13)


긴 시간 동안 첫사랑과 연애했고, 그와 헤어지며 '사랑은 이제 필요 없어.'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필요 없지만 연애는 쉽게 했다. 연애는 곧 내게 '사랑받는 것'을 의미했고, 당시 내게는 쉬운 일이었다. 사람을 잘 관찰하고 요구를 잘 읽었기에 밀고 당기기를 잘했다. 원하면 당겼고, 귀찮으면 밀어냈고, 싫증 나면 등을 돌렸다. 사랑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사랑받는 것'에는 집착했다.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남자여도 사랑받아야 직성이 풀렸다. 남자에게 애정과 헌신으로 대접받는 것을 사랑받는 것이라 여겼다. 30대 초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교제를 시작하고 얼마지 않아 결혼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결혼 얘기는 남자의 소유 욕구를 채우고자 나불대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남편에게도 역시 코웃음을 쳤다. 그럼에도 연애 1여 년 만에 남편과 결혼을 했다. 내가 자기만큼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열하는 이 남자의 순수함을 믿었다. 사랑으로 충만한 미래 정확히는 사랑받는 것으로 충만한 미래를 상상했고 믿었다. 해맑게 우매하고, 천진하게 성급한 믿음은 결혼을 결정한 중요한 전제 중 하나였다.


남편에게 "아, 그때 연애했던 남자(남편)는 잘 살고 있을까? 그 남자 나한테 참 잘했는데. 보고 싶네."라고 말하면, "내가 계속 그렇게 살면 노예지. 난 이제 해방됐어."라고 히죽거리며 말한다. 낭만적 사랑의 환상은 지난한 일상에 묻혀 사라진 지 오래다. 남편의 사랑(헌신과 대접)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빨리 사라질지 몰랐다. 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거나 포기를 받아 들여야 할 바에는 '차라리 이혼이 속 편하겠다'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쥬 플리즈 고 어웨이(롸잇 나우)?'를 해야 하는데, 내가 선 아내와 엄마의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랑은 내가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고 결혼한 건데 이건 뭐지?' 하며 어리둥절하다가 사랑에 대한 내 태도가 얼마나 우매하고 위험했는지 깨달았다.


결혼(의 지속)은 너무 어렵다. 애정과 헌신으로 대접받기를 노골적으로 바라는 남편을 보며 자주 분노한다. 아내와 엄마, 며느리의 자리로 이동한 후 과거 속 나와의 단절감, 상실감들로 괴로웠다.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새로운 역할들에 속수무책 얽혀 들어가면서 나는 크게 당황했다. 두려움, 혼란과 같은 감정의 절박함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내, 엄마, 며느리'의 이름표가 붙인 당위들에 좀 의연해질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알아서' 통쾌하고, 방향을 결정할 수 있어서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일상에서 빈번히 불행을 느끼게 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더 자주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집안 잡일 분담'과 같은 사안을 두고 끊임없이 싸움을 해야 하는 것도 지치고, 가사와 육아에 매몰된 내 삶을 구제하지 못하게 막는 남편과 아이들을 원망하는 일도 지쳤다. 죄책감은 또 왜 이렇게 자주 드는지.


페미니즘을 마땅한 사회 정의라고 생각했지만 그 마땅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내 삶과 가정에 큰 불만을 느꼈다. 정의가 나의 행복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할까' 오래 생각했다. 나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인 남편과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 행복감을 느끼고 싶었다. 적대하고 분열시키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연합하고 평화로운 페미니즘 실천을 하고 싶었다. 평화로운 페미니즘은 결국 포기이거나 자기합리화적 협상인 걸까 생각하다가 '사랑'이란 단어를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그렇게 '사랑'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사랑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결혼 생활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사랑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내 삶에 긍정적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수동적 포기가 자발적 양보가 되고,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끝없는 주도권 싸움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40)


가족과 애인으로부터 애정, 기회, 용서, 재화 등을 '받는' 것으로 주로 사랑을 경험해왔다. 애정, 배려, 용서 등을 '주는' 것으로 사랑을 했던 첫사랑과의 경험은 구질한 경험이라는 잔상을 남겼고, 20대에 가장 후회되는 일로 꼽았다. 나는 준다는 것을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40)으로 여기고, 주려고 하지만 단지 받는 것과 교환(40) 일뿐이라고 여기는 전형적인 시장형 성격의 사람(40)이다. 나는 아이들에게도 대가 없이 사랑을 주는 게 힘들다. 아이들이 내게 주는 기쁨과 환희에 웃다가도 내가 한 희생의 크기를 따진다. 아이들이 커서 자립해 나갈 때 질척거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금부터 되새길 정도로 사실은 내 노고의 보상을 바란다. 아이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고 생각하는데, 기본적으로 사랑은 내 것을 포기하거나 나 자신을 배제시키게 만든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도 역시 득실을 따져가며 사랑을 한다. 남편에게는 등가교환의 공정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조차 되지 못할 때가 많다. 그에게 사랑을 '받음'으로 내 실존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고, 그의 지원을 받으며 내 삶은 더욱 확장될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남편으로부터 든든한 안정감을 얻었고, 시댁의 부의 편승해서 자산은 증가했고, 새로운 경험들로 내 삶은 확장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남편에게 계속 불평을 한다. 회사에 다닐 때에는 일을 해도 가사와 육아의 9할은 내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을 불평했고, 일을 그만둔 뒤로는 가사와 육아 때문에 커리어를 잃었다 불평했다. 남편이 "가장의 무게.." 운운하면, "지난 몇 년간 내가 생계부양자였으니까 생색 낼 생각일랑 하지 말라."라고 쏘아붙인다. 사랑과 가족의 이름으로 받는 것은 당연시하지만 주는 것은 굳이 생색내거나 불평하는 사람은 나이면서도 말이다.


에리히 프롬은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41)라고 했다. 그와 달리 나는 나의 시간, 에너지, 소유를 주어서 즐겁고 기쁜 적이 드믈다. 새벽에 칭얼거리는 아이를 위해 일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남편에게 "기꺼이 내가 새벽에 일어날게. 나도 출근해야 하지만 뭐, 모든 피로감은 내 몫으로 할게. 푹 자고 일어나 상쾌한 아침을 맞는 당신의 모습을 보니 기뻐."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에리히 프롬의 말의 말에 따르면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능동적으로 소비하면서 '주는 것'에서 자기 효능감과 만족을 느낀다는 그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는 것으로 자기본위적 만족감을 느끼려면 '넉넉한' 상태에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배가 고프거나, 잠을 자지 못했거나, 통장의 잔고가 비어있는 상태에서 '주는 것'이 즐거울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의 상관없이 "사랑은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라고 말했다. 즉 '주는 것'으로 성격의 방향과 태도를 정해야 한다는 거다. 낭패감이 들었다. 사랑을 제대로 하려면 득도의 경지에 올라야 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랑의 이론적 방법을 이해하면 그간의 감정적 마찰이 해결되고, 짜증 나는 포기가 너그러운 양보로 수월하게 변화할 줄 알았다. 학습하면 마법처럼 나의 감정과 태도가 변할 거라고 착각한 거다. 태도의 변화는 학습 외에 노력이 더 필요하다. 그것도 가혹할만치 노력해야만 성취할 수 있는 변화다. 제대로 사랑에 대해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기 전이 훨씬 속 편한 삶일 수 있겠다 생각했다.





사랑의 핵심적 기술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52)


사랑을 목표로 삼았다. 자기 계발서의 기술을 적용하듯 자기 개조를 목표로 사랑의 기술을 습득해보기로 결심했다. 사랑이 감정적 기쁨과 편안함을 보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이로운 변화를 이끌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내가 하는 학습, 노력, 기술 연마의 대상은 주로 남편이다. 나와 가장 친밀한 사람은 남편이고, 나와 가장 분열하고 적대하는 사람도 남편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지난한 일상에서 함께 희락 하고 분노한다. 여럿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을 받으려'고만하는 모순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낭만적 사랑의 함정, '그는 나를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위태로운 부부이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잘 사랑하고 싶다.


프롬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사랑의 핵심적 기술이라고 보았다.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그를 위해 '일하는'것(46)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46)이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을 보호하고 책임지고 있다. 남편은 장성한 성인이고 따라서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 나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나는 남편 입에 숟가락을 넣어 줄 필요도, 화장실에 데려갈 필요도 없지만 (종종 먹여달라, 씻겨달라 요구하지만..) 그가 만약 스스로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그를 보호해 줄 유일한 사람은 나라고 생각한다. 또, 그가 나의 애정과 보살핌이 필요한 취약한 상태에 놓여있을 때 나는 기꺼이 '응답'하고 곁에 있어준다. 나는 평소 가정 내 여성에게 요구되는 '정서적 위안자'로서의 역할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엄마에게서 "남편을 성공시키려면 집에서 편하게 쉬게 해 줘라. 겉돌게 하지 않으려면 잘 받아줘라."라는 말을 듣고 경악했다. 남편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정서적 서비스 제공자'가 되라는 엄마의 권고를 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다만 남편이 실패감, 모욕감, 소외감과 같은 심리적 타격을 입었을 때, 그의 감정과 정서를 정성껏 보듬어 준다. 그의 편에 서서 응원과 에너지를 북돋아준다. '정서적 위안자'가 되어 거들먹거리는 이의 비위를 맞춰줄 의향은 없지만 남편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의 감정에 공감하고, 애정과 위로를 표현한다.


프롬은 존경을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47)이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47)고 했는데 따라서 사랑의 핵심 요소인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때'(47)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남편을 존경하고 있지 않고, 그를 잘 알고 있지도 못하다. 내가 남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종종 그에게 최악의 사람이 되는 까닭은 이해충돌의 자리에서 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내가 이용하기 쉽도록 그를 조정하려 든다. 나와 남편의 전투는 육아와 살림의 분배 문제에서 시작될 때가 가장 많다. "너만 돈 버냐. 같이 버니 살림과 육아 공동으로 분담하자"라고 내가 말하면, "집은 내가 해왔으니 경제적 기여도는 내가 훨씬 크다. 살림과 육아의 지분이 네가 더 높은 게 당연하다. 그리고 육아와 살림은 원래 여자가 잘한다."라고 남편은 말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내인 너에게 받는 것이 없다. 나도 좀 챙겨달라"라고 남편이 말하면 "집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어떻게 감히 아무것도 받은 게 없다고 말하냐.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건사하는 것만으로 벅차다."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 부부의 싸움은 매번 이런 식이 었고, 문제 해결이나 개선 없이 반박하고 비방하는 말싸움 기술만 늘어갔다.


프롬이 사랑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한 '지식' 즉 남편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그가 억울할 만도 하다. 남편은 본인이 가져온 자산을 나눠서 공동 소유하게 되었으니 자산을 공으로 받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 보상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내가 평등을 외치며 가사노동 분담을 요구했으니 괘씸하기도 하고, 서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등한 관계를 위한 공정한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르자면 많은 자산을 가져온 남편은 나보다 경제적 기여도가 높다. 남편의 기여도에 관한 보상을 어떤 식으로든 내가 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남편이 바라는 보상 '가사노동 영역에서의 배제'를 수렴해야 하는 거다. 근데 그게 참 힘들다. 번 아웃으로 회사를 퇴사한 후 '기회비용'을 조목조목 따지며 불만을 늘어놓고, 자금 출처가 시댁이 아닌 친정이었을 경우 과연 남편이 나처럼 많은 것을 감당했을지 질문했고, '번거롭고 힘든 일은 다 내게 떠넘기면서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남편의 사랑을 회의했다. 어떻게 사랑이 이렇게까지 계산적일 수 있는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에 살며 이해타산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고, 이해타산적인 사람들이 하는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냉소할 수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내가 그렇듯' 그도 그럴 것이라 이해해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 연습


나는 사랑이 참 힘들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는' 행동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도 계산적인 내 모습을 보며 '나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힘들다 여긴 것은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여받은 엄마나 아내의 역할에서 '주는' 사랑을 끊임없이 강요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은 사랑의 이름으로 배려와 양보를 강요받는 경우가 많고, 특히 엄마의 자리에 서면 모성애에 관한 사회적 강요를 내재화하기까지 한다. 나는 '엄마라면 당연히 내어줘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이 생각이 진짜 내 바람인지 혹은 마땅히 그래야 하라고 하니까 하는 건지 스스로 질문하지도 못했다. 육아를 하며 종종 '탈탈 털린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주는' 것이 응당 자연스러운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주는 것이 덜 아깝거나 손해 본 것을 덜 신경 쓰는 사람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을 학습하고자 했던 것은 이상적인 엄마와 아내의 모습을 희망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이해타산적이지 않은 지고지순한 사람이 되면 이 가정에 분쟁은 급격히 줄어들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의향도 없고, 될 수도 없다. 사랑의 태도를 학습하고 시험하겠다는 욕심은 나를 성장시키고 싶다는데서 기인한다. 나는 나 자신이 성장하길 바란다. 완벽한 역할 수행을 위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내 안의 힘을 기르기 위함이다. 아내와 엄마 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습이 이기적으로 보이더라도 그런 내 모습을 긍정하고 싶다. 프롬이 말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은 사랑의 한 모습이고, 사랑의 대상은 나를 포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짜증 나는 포기가 너그러운 양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를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 가정 안에서 평등하고 민주적 관계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한다. 하지만 가부장적 성역할 분담을 나누고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여 암담해질 때가 많다. 전업 주부인 나를 무능력하고 열등하다고 종종 여긴다. 자립해서 생계를 책임질 능력이 없거나 줄어들었고, 사회적 지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내 위치에 대한 불안은 자존감을 낮추었고, 자존감의 문제는 너그러운 양보가 될 수 있는 문제를 짜증 나는 포기로 바뀌게 했다. 나의 문제에 고립된 시선을 들어 올려 상대를 향하게 했다. 단지 시선의 방향을 바꿔본 것뿐인데 상황과 상대가 이해되었고, 나의 마음이 얼마간 바뀌었다. 성급하게 화내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보았다. 비난받아도 반박하지 않고, 당신의 입장을 이해한다고도 말해보았다. 불평할 것들이 쌓여도 입을 닫고, 고맙다는 말만 해보았다. 의도적으로 태도를 바꿔보았을 뿐인데, 내가 보다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해와 배려의 태도를 강요나 의무로 느꼈을 경우 감정적 소진을 경험했다. 하지만 어떠한 강압 없이 자발적으로 내 태도를 변화시켰을 때 성장의 기쁨, 만족감을 가졌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처음으로 의도적인 양보를 했고, 내가 바란 의도대로 나 자신의 행동에 고양감을 느꼈다. 의지의 동기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나와야 옳다.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주도권 싸움을 그만하자고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에게 받은 것이 크고, 고마워하고 있어. 근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누어준 자산이 나를 찍어 누르는 권력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 나는 가끔 오빠의 행동에서 '돈을 줬으니 이 가정의 실권자는 나고, 그러니까 내 말을 따라'라고 말하는 것 같아 슬퍼. 우리는 서로를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한 왕좌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부부는 서로 의존하고 협동하고 교감하는 관계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빠를 사랑해. 함께 노력하자."라고 말했다. 내가 주는 것을 아까워하고 누구보다 계산적인 사람임은 남편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내가 하는 말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태도의 변화를 일상에서 계속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노력이다. 그것도 내 본성에 반하는 살벌한 노력이다. 하지만 나는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의 사랑의 기술을 몸에 익힐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또 변화를 이끌어 낼 힘이 내게 있음을 믿는다.




여보, 당신은 내 인생의 가장 풍부한 글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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