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난 Jan 18. 2021

가사 분담, 이게 별 거 아닌 문제라고?

제발요. '별 거' 맞다니깐요.

전쟁의 서막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가사분담 전쟁은 설거지 때문이었다. 요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밑반찬 두어 개를 만드는데도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한 끼를 차리기 위해 퇴근 후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았고, 식사를 마치면 녹초가 되었다. 임신까지 하고 있었던 터라 피곤함이 더 했을 거다. 남편이 마땅히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거지를 해본 적 없다던 남편은 "내가 있다가 할게. 근데, 내가 안 하면 결국 엄마가 해줄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지. 금. 당. 장. 하라고!" 남편은 닦달하는 나의 잔소리에 못 이겨 마지못해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는 주섬주섬 설거지 거리들을 모아 갖다 줬다. 설거지가 원래 그렇지 않나. 가스레인지에 올려져 있는 냄비, 요리에 쓴 식기구, 이 방에서 컵 하나, 저 방에서 접시 몇 개. 흩어져 있는 '설거지거리들이 +1, +1, +1' 된다. 남편은 계속 늘어나는 설거지거리들이 짜증 났는지 "나 안 해! "라며 고무장갑을 벗었다. 그러고는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버렸다.

공격성을 과감 없이 표출하는 얼굴로 "지금 설거지하다 말고 뭐해?"라고 물었다. 남편은 자꾸 설거지거리들이 추가되니 짜증이 나고, 허리가 아파 좀 쉬었다 다시 하겠다고 했다. 머릿 털이 쭈뼛 설만큼 화가 났지만 알겠다고 하고선 기다렸다. 남편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안 하나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반나절 이상 화를 눌렀더니, 제어 불가능한 분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교활하게 시어머니 뒤에 숨어 설거지의 의무를 회피하는 남편을 응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늘어져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서 당장 설거지를 하라며 남편의 러닝셔츠를 포악하게 잡아 뜯으며 포효했다. 설거지를 하지 않는 남편에게 왜 화가 나는지 조목조목 설명할 재간이 없었던 나는 "왜 설거지를 안 해! 왜 설거지를 안 해!"만 반복하며 악을 썼다.​



8년째 전쟁 중

설거지로 인해 도발된 가사분담 전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설거지는 내게 '보존, 존중, 애정'의 척도가 되었다. 일상이 무탈하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한없이 번거롭고 사소로워 보이는 일들을 성실히 반복해야 한다. 너무 하찮게 보여서 '별 일'도 아닐 것 같은 가사 일은 가족이 한 명씩 늘어날 때마다 복리의 방식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전히 '별 것도 아닌' 모습을 하고 미묘하게 나를 짓눌렀다. 나와 가족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성실하게 가사 일을 했을 뿐인데,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갔다. 하도 쩨쩨하게 조금씩 떼어지는 느낌이라 불평하기도 애매했다. 어느 순간 나가 좋아하던 것들이 일상에서 사라졌다. 책을 읽던 기쁨, 글을 쓸 때의 기쁨, 음악을 들으며 혼자 산책할 때의 기쁨. 많은 기쁨들이 사라졌다. 내가 만족하던, 기쁨이라는 한 단어 안에 들어 찬 갖은 기분들을 잊어버렸다. 일상에서 내 자신이 통째로 사라진 듯한 느낌을 종종 느꼈다.

가사와 육아에서 분리되어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나를 보존하는 일과 같다고 여겼다. 나는 엄마나 아내로서의 삶만 희망하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간 정성 들여 만들어 왔던 나의 정체성도 보존하고 싶었다. 침해받지 않는 시간을 통해 보존되고 있는 남편의 사생활과 정체성을 존중해주는 것처럼 나의 사생활과 정체성도 남편이 존중해주기를 바랐다. 남편은 가사와 육아를 내가 전담하는 대신 그 노고를 돈으로 보상해줬다 말했다. 그러니 투정을 그만하면 안 되느냐 했다. 남편에게는 사치스러워 보이는 투정이 내게는 절규임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에게 부과된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어떤 부분이 부당한지 이제는 조목조목 설명할 수 있지만, 남편은 의도적으로 귀를 닫았다. 남편은 시가에서 준 자산을 공동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나에 대한 애정을 증명한 것이라 말했다. 그가 말한 애정의 방식은 때때로, 자주 암담하고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돈을 줬으니 감내하라고 말하는 것이 애정으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걸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남편애게 느껴지는 애정은 내게 없다.

('설거지'는 때때로 '빨래 개기', '청소기 돌리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등 다른 하찮고 번거로운 다른 이름으로 대체된다.)


종전이 있을까

여러 조언을 들었다. 남자는 그런 방식으로 바꿀 수 없다고, 약한 척 힘든 척해서 보호해주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라고 했다. 시가에서 준 자산에 더욱 감격해하며 남편에게 보다 자주, 과하게 감사를 표시하라고 했다. 남자는 단순해서 치켜세워주면 결국 여자의 말을 들을 거라고 했다. 아양을 떨어서 남편의 기분을 맞춰주는 감정 노동까지 해야 한다니 서러웠다. 나는 매일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더러운 것도 닦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남자는 항상 떠받들여주거나 보듬어주거나 어르고 달래야 하는 존재면 나는 누군가를 맞춰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까 생각했다. 나는 남편에게 아양을 떨어도 서글펐고, 아양을 떨지 않아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도 서글펐다.​

내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그런데 참 많이 지친다. 나에게 당연한 것이 남편에게 당연한 것이 아닐 때, 그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버겁고 어렵다. 하찮고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을 분담하게 만들기 위해 남편에게 들이댄 올곧은 당위들은 "돈 줬잖아"라는 그의 말 앞에 뚝뚝 떨어져 뭉개진다. 본인이 노력해 번 돈도 아니고, 부모님께 거저 얻은 돈을 가지고 생색내는 남편이 참 뻔뻔스럽고 못났다 싶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한다. 그러면 더 유치하고, 졸렬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서로를 할퀴는 막장 싸움이 시작된다. 평화와 평등이라는 고고한 이상을 위해 발발된 가사분담 전쟁은 추잡스럽고 저속한 말과 태도를 통해 치러지고 지키고 얻고자 했던 이상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


남편과 나는 돌림노래를 부르듯 각자의 말만 무한 반복한다. 나는 피해자, 남편은 가해자의 구도 안에서만 남편과 나의 관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남편도 역시 역으로 생각할 테다. 전쟁은 상대의 항복을 얻어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내가 가사 분담에 촉발된 긴장에 '전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결국 남편의 항복을 원해서일 거다. 내가 이름 붙인 전쟁의 끝은 과연 있을지 의문한다. 승리나 패배, 항복이나 굴종이라는 말을 지우고, 애초부터 '전쟁'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달라질 것이 있을지 생각해본다. 나는 남편의 항복, 존중, 변화를 기대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싸우며 너그러운 양보를 가장한 회피,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 진정성 없는 이해, 차라리 내가 항복하고 싶다는 유혹만을 내 안에서 확인할 뿐이다. 내가 이 전쟁을 통해 무엇을 지키고 얻고자 하든 간에, 나는 오늘도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더러운 것도 닦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진짜 지겹다 설거지. 우리 집만 이렇게 쌓여있는거 아니자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