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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높빛 Dec 21. 2021

절대로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야

책임을 지녀야 하는 나의 천성은 혼자 있는 나를 울부 짖게 만든다


    이야 너는 어디를 가든 감투 자리는 꼭 하나를 맡는구나.

    너네 조원 애들은 좋겠다? 너가 맨날 발표해서.


   내 인생을 내 스스로가 표현하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 앞에 항상 붙던 수식어는 '책임감'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서부터 반장과 부반장을 놓치지 않고, 중학교 때 전교부회장, 고등학교 때 학년회장을 거쳐 대학교에 와서도 과대표와 학생회장을 놓치지 않은, 그야말로 감투와 한 몸이 된 삶을 살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4학년 과대표를 하며 졸업준비위원장을 맡고 졸업을 하는 지금 내 삶을 되돌아보면 큰 단위든 작은 단위든 항상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사적인 모임의 주도도 종종 내가 하게 되고, 2~3인의 소규모 팀플부터 동아리, 학생 집단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내 목소리를 내기에 바빴다.

   내가 언제부터 이러한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은 어린 시절 나의 작은 추억 하나가 떠올라 이 글에 녹여보고자 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문구점에 500원 주면 파는 작은 책자가 있다. 무서운 이야기, 유머, 심리테스트 등 다양한 글귀가 모여있는 그 작은 책에는 혈액형 별 특징도 써있었다. 나는 A형의 피를 가졌는데 책에서 'A형은 섬세하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고 적혀있었다. A형인 나는 그것이 내 성격이라고 굳게 마음먹고 살았다. 결국 나의 생각을 심리적인 부적-MBTI, 혈액형, 별자리 등-에 의존하며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의 합리화를 실현한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혈액형에 의지하였고, 대학교를 다닌 나는 MBTI에 내 성격을 합리화 하였다. ENFJ의 A형. 그게 나의 정의(Definition)였다.


   엄마의 증언을 토대로 유추하면은 엄마의 가르침 덕에 책임각을 가지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인가 하는 추측을 한 번 정도 해볼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외동으로 자랐기 때문에 외동 같은 모습을 바깥에서 보이기를 되게 꺼려하셨다. 4살 때부터 어른이 보면 배꼽인사를 하라고 꼭 시켰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손 가져다대지 말고 남부터 양보하고, 남이 무례해도 같이 대들지말고 웃으며 대화하라는 그런 미덕을 가르쳐주셨다. 물론 모든 부모님이 다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엄마가 가르친 이타성이 곧 책임감으로 발달한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무슨 변명을 하든 결국 너의 행동으로, 너가 하고 싶어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 아니야 ?


   살면서 친구들에게 힘들다고 고민을 털어 놓으면 내 고민을 공감하는 친구도 있고, 내 고민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는 친구도 있다. 고민을 들어주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가 최선을 다해 나를 위로해주는 방식이고 나도 그들의 위로를 수용하며 발전하기 때문이다. 종종 나의 고민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친구들은 결국 책임감을 가지고 솔선수범을 자처한 행위의 주체는 나고, 내가 하고 싶어서 책임을 지는 것인데 왜 힘들어하냐고 의문을 던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책임감을 가지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다. 제목하고 삐딱선을 타는 주장을 내세우면 이 글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질문에 '반만 맞다'고 대답하고 싶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도 아니고 이런 질문에 반만 맞다가 맞는 대답인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든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책임을 지는 것을 좋아하다 가끔은 이러한 짐에 대한 부담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존재한다. 나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책임감을 가지게 되는 것에는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주체적인 책임감으로 '정말 내가  사람들을 책임지고 싶다' 마음가짐이고, 다른 하나는 이타적인 책임감으로 '남들도 내가 하기를 바라겠지'하는 생각과 ' 끼치지 않고 1인분은 해야한다'하는 강박에서 기인한 결과물이다. 나는 종종 후자가 강할 때가 있다. 완벽주의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1인분은 하고 싶어 내가  들고 처리하는 습관이 있다. 팀플을   밤을 새서 바꿔놓고, 아무도 지원자가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 있을 때는 답답해서 먼저  들고 행동을 자청한다.


   책임감은 항상 성취감을 가져오기 전에 부담을 같이 불러온다.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다. 까딱하면 욕 먹는 학생집단의 장이나, 무관심과 무능으로 대응하는 팀원과 함께하는 조장에게는 주변 학우들의 반응과 무지막지한 과제의 처리량이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나처럼 책임감을 안고 사는 이들이 안타까워 하는 것은 남들이 그게 정말 내가 좋아서 저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나를 한심하게 여기거나 고민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던져주지 않는 것이다. 설령 내가 책임감에 부담을 느껴 힘들어할 때 "결국 너가 좋아서 선택한거잖아. 누가 강요했어?" 라는 대답을 해버리면 결국 할 말을 잃고 끄덕인다. 제 화에 못 이겨서 멈추는 것인지, 상대방이 나랑 상극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좋아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들의 마음 속 강박이 이런 행동을 유도하여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 살 곤 한다. 영화 중에 <크라잉 게임(1993)>이 있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관람하지 못했고, <파페포포 안단테>라는 책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극 중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지만 나도 영화를 관람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 중 등장인물인 조디가 퍼거스에게 이솝우화 이야기를 꺼낸다. 바로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다.


   옛날 옛날, 전갈이 강을 건너고 싶었지만 수영을 못해 수영을 잘하는 개구리를 찾아가 부탁을 했다. 개구리는 전갈이 찌를지 모른다며 거절을 했다. 그러자 전갈은 "내가 독침으로 너를 찌르면 너와 나, 둘 다 빠져 죽잖아. 내가 죽으면서까지 너를 찌르겠어? 그러니 널 찌르지 않을 수 있어." 라며 말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개구리는 결국 전갈을 태워주기로 결심하고 등에 전갈을 태웠다. 강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물결이 거칠어지자 겁이 난 전갈은 개구리를 찔렀다. 결국 둘 다 죽게 되고 만 것이다. 죽어가는 개구리는 전갈에게 물었다고 한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왜 나를 찔렀지?" 개구리 위에 스멀스멀 차오르는 물을 바라보며 전갈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게 천성인걸 ...

    

   사람마다 각자의 천성이 있다. 가볍게 생각하는 친구는 중요한 시기에 말실수를 하며, 진지한 친구는 재잘재잘 장난이 필요할 때에 어설픈 농담을 꺼내버리는 상황을 낳는다. 서로의 천성을 비관하며 울부짖는다. 결국 책임감은 내 천성이다. 책임감으로 스트레스 받고, 속상해하고, 힘들어해도 내 천성이 이렇기 때문에 나는 매년 바뀌는 새로운 소속마다 머리를 돌돌 싸며, 이런 책임감으로 울부짖을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아무도 없는 2평 남짓한 내 방에서 내 천성을 비관하던 사춘기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감싸 안아줄 수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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