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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높빛 Dec 16. 2021

운길산에서

산 꼭대기가 아닌 등산하는 과정에 느끼는 성취감



   가을이 되니 푸른 초목은 빨강, 노랑, 주황,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우리나라의 사계절을 보면 사람의 인생과 닮은 것 같다. 봄은 형형색색 아기자기한 모습을 갗주기 때문에 어린아이와도 같다. 들판과 강산의 초목들이 각자의 고유한 성격을 눈치 보지 않고 뽐내는 것이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와 닮아서다. 자연스럽게 여름은 청년과도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삶도 여름이다. 여름이 되면 모든 초목은 초록색의 옷을 입는다. 내가 더 화려하고 밝은 초록 잎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것 마냥 말이다. 나와 내 또래의 삶도 비슷하다. 높은 학점, 높은 스펙, 좋은 대학과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위해 젊음의 힘을 마음껏 뽐낸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각자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각자의 개성이 사라지는 시기인 것 같다는 점이다. 마치 어떤 나무인지 분간이 안 되는 여름의 나무들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가 보내는 가을은 중년의 계절 같다.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각자의 삶에서 느낀 연륜을 바탕으로 제 2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마치 가을의 형형색색 단풍잎처럼 말이다. 노년이 찾아오면 연륜과 열정이 모두 사라진다. 백발의 노년은 하얀 눈을 맞은 나무와도 같다. 개인의 인격체를 유일하게 뽐낼 시기가 유년과 중년밖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하기는 하지만 가을의 풍경이 아름다운 데는 변함이 없다.


   이런 가을 풍경을 오감(五感)으로 느끼고자 오랜만에 등산을 청하였다. 4학년 2학기, 졸업 전시와 논문 발표도 끝나 여유가 생겨서 바깥에 다녀보자는 마음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내가 오르려는 산의 이름은 운길산. 구름이 잠시 머물고 가는 산이라는 뜻으로 남양주시 끝자락에 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水鍾寺)와 정상에서 볼 수 있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어우러짐을 보고 싶어서다. 기세등등하게 1리터의 생수통과 바람막이, 그리고 내 닳아 해진 운동화를 챙겨 등산을 시작했다. 등산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티가 확연히 나는 사람이었다. 오직 수종사와 운길산 정상을 보겠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빠르게 등산을 시작했다. 마스크를 끼고 등산을 해서 그런지 숨도 가빠오고, 무엇보다 닳아서 해진 운동화가 마이너스 요소였다. 낙엽 때문에 산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생 좀 했다.


   수종사에 도착했고, 나는 원하는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산사와 수목, 강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눈으로 느끼며, 몸과 마음이 경건해지는 불상(佛像) 앞을 지나게 되었다. 이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음을 느꼈다. 수종사에서 한 번 쉬고 올라가자니 이전처럼 빠르게 오르기는 힘들 것 같아 천천히 올라갔다. 수종사에서 정상으로 가는 구간으로 올라가니 등산객들을 볼 수 있었다. 등산객들은 나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여기 산의 등산객들은 대부분 중장년층인지라 정상만을 즐기고자 성큼성큼 걸어오는 나와는 다르게 등산 자체를 자연스럽게 즐기는 모습을 보이셨다. 산 중턱에 위치한 큰 바위에 앉아서 경치를 바라보는 분, 평상 위에 앉아 사진을 찍으며 여유를 즐기는 분, 그리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도록 하산하는 인원이 먼저 내려오기 전까지 천천히 기다리는 분까지 보며 그들은 나에게 없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그들처럼 등산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등산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었으며,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배려하며 산에 올라갔다. 등산하는 방식을 바꾸니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굴속에 있는 금동부처상과 등산객들이 만든 석탑과 같이 산 속에서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게 되고, 정상까지 가는 고개에 어떤 아저씨와 같이 오르게 되어 말동무를 해주셨다. 조용한 나의 산행에 재미난 동반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윽고 정상에 도착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연스레 평상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았다. 이내 여유를 가지게 되고 몸을 일으켜 경치를 내 눈에 담았다. 막상 처음에는 경이로운 경치에 놀랐으나 정상에서의 풍경은 비슷비슷하여 만족감을 크게 느끼지 못하였다. 오히려 산에 오르면서 찍은 사진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다양한 풍경을 보며 왔다는 것을 되새기는데 더 큰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수종사 이전까지 내가 정상만 보고 달려온 행동이 마치 지난 4년의 대학 생활의 내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물론 4년이라는 대학 생활을 앞만 보고 달린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인생이라는 끝없는 구간에서는 산과 같이 평탄치 않은 도전 과제들이 무수히 많으며, 산 정상으로 비유할 수 있는 도전 결과에 운운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특히 4학년이 되니 합격에 웃고, 불합격에 우는 이분법적인 삶은 오히려 내 마음을 옥죄여왔다. 가령 공모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경험이 또 다른 공모전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게 하는 반면교사의 결과물이 되었을 것인데도 나는 나의 실패한 결과에는 그 과정까지 모조리 부정하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부끄러움을 깨닫고 나는 하산하였다. 운길산에 머문 구름이 ‘잠시’ 머물렀다 다른 산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나 또한 도전 과제가 끝나면 다른 도전 과제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에서 단지 만족이나 비관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결과를 야기한 과정에서의 배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또 다른 ‘산’을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의 삶을 살았던 나는, 가을의 삶을 사는 운길산과 그 운길산을 즐기는 등산객들에게 배우며 운길산 등산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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