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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높빛 Dec 22. 2021

출퇴근길에 쓰는 편지

내 삶에도 경로의존성은 존재하나 봅니다

    1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이 다가왔습니다. 나는 이리 바쁜데 아해는 12월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제 12월이 어떤지 짤막하게 설명 드리자면 덜컥 대학원에 합격하여 5년의 미래가 정해졌습니다. 물론 합격한 대학원은 내가 다닌 대학과 다른 학교이지만 3년 동안 대학을 다니며 여러 교수님의 연구실 인턴으로 활동하면서 얻은 다양한 성취가 이러한 결과를 도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학원에서 더 열심히 연구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모교 연구실에서 논문을 더 발전시키고 있고, 다른 날에는 공공기관에 출근해 공공사업과 관련한 프로젝트의 인턴으로 12월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의 결과인지 12월은 많이 바쁩니다. 아해의 12월은 여유롭고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솔직히 많이 두렵습니다. 내가 선택한 대학원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적은 소득에 5년 간의 대학원 생활로 내 남은 20대를 바친다고 생각하니 주저하게 만듭니다. 정말 바라고 고대하던 대학원이었는데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막상 불합격 세 글자를 합격창에서 보았다면 좌절과 염세로 내 남은 12월이 얼룩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안그래도 목표했던 두 개의 대학원 중 하나는 불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 심정을 작게나마 느꼈습니다.


   내가 공공기관으로 출근할 때는 경의중앙선을 타고 왕십리역에서 환승을 합니다. 솔직히 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나는 힘들지 않습니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왕십리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이 제일 힘듭니다. 아해가 왕십리역을  오지 않아 실감이 나지는 않겠지만은 그래도  세부전공이 교통인지라 깔작대며 배운 입문자의 말을 조금 빌려 표현 해보겠습니다. 우선, 왕십리역은 2호선, 5호선, 경의중앙선, 경춘선, 수인분당선까지  5개의 철도가 지나가며, 인근 신당이나 회기, 청량리의 1호선과 6호선을 이용하는 잠재승객 덕분에 출퇴근길이 매우 붐빕니다. 전철이라는 가수를 보러  콘서트인  알았습니다. 경의중앙선돠 5호선, 수인분당선, 경춘선 모두 경기도 신도시들이 몰려있는 구간인지라 신도시가 하나  생길 때마다 나와 같이 경의중앙선에서 환승해서 2호선을 타는 사람은 점점 많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전문가들은 당장 대책을 내세우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지상구간은 1호선, 경춘선, 경의중앙선, ITX-청춘, 무궁화호, KTX 전부 달려 철도가 버티지를 못하고, 지하도 이리저리 선로들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을 것은 GTX지만  전에 제가 서울을 도망 나오는 것이  빠를  같습니다.


    제가 경의중앙선 왕십리역에서 하차하는 순간은 롯데월드 오픈 순간과도 똑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출구를 찾아 움직이는데 사실 본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밀면서 그 미는게 전달의 전달을 반복해 나도 모르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내 의지 같지만 내 의지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개중에는 저마다 안타까운-출퇴근의 관점에서-사연을 가진 이도 있었습니다. 양보한답시고 내리신 한 분은 경의중앙선 문이 닫히며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15분에서 25분을 기다려야 했으며, 2호선 열차를 많은 인파 때문에 눈 앞에서 놓쳐 회사에 전화를 하던 이도 있었습니다.


     조금은 뜬금없지만 경로의존성이라는 용어에 대해 아해에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우리 아해는 이런 용어 설명을 하면 나의 이야기를 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이야기 해주려고 합니다. 말 그래도 기존 경로에 대한 의존 때문에 새롭고 간편한 대안이 나옴에도 기존 경로를 고수한다는 의미입니다. 정의가 어렵다면 예시를 들어봐야겠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는 쿼티(QWERTY) 자판인데 아해에게 조금 더 쉬운 예시를 알려주지면 제곱미터를 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지된 단위인 평이 더 잘 통용되는 점과 도로명주소가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번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만나이를 쓰는데 한국인들은 세는 나이로 나이를 계산하는 것도 경로의존성 예시가 되겠습니다.


    저는 출근길에서 두 가지의 경로의존성을 느꼈습니다. 하나는 회기역 1호선에서 환승하면 더 빠르게 갈 수 있는데, 어린 시절 시청역 근처로 영어학원을 다녔던 습관이 있었던지라 2호선 환승을 아직까지도 고집합니다. 그리고 빠르게 환승할 수 있는 구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6-3번 레인에서 내려 굽이굽이 계단을 타고 오르내립니다. 내가 이러한 과정에서 느꼈던 것은 나의 대학원 진로를 결정한 것도 어쩌면 경로의존성에 기인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학창시절 천문학자-천문학자는 결국 대학원 과정을 모두 수학해야 천문학계에 덤벼들 수 있는 직업-의 꿈을 꾸며, 대학원 과정에 대해 나도 모르게 긍정을 하고 있었고, 학력과 학벌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으셨던 부모님 곁에 자라서인지 대학원에 대한 선택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해가 잘못 들으면 남탓으로 보이지만 절대 아님을 밝힙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전까지 그래왔었기에 나는 이런 진로만을 생각했고, 이런 진로를 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저는 경로의존성의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해도 요즘 고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아해도 경로의존성에 빠진 것이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해가 결정할 미래의 먹거리-수십 년 동안 무엇을 해서 벌어먹으며 살지-에 대해서는 아해의 나이와 경력, 아해의 전공, 주변사람과 사회의 시선이 아해의 경로를 만들고 아해는 그 경로에 대한 강한 의존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조금은 그 경로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용기를 아해는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만 나는 시청역에서 내려야하니 글을 마치겠습니다. 하루를 시작 해야겠습니다. 아해도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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