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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타누키 차차 Aug 18. 2019

영실이의 상차림

북에서 온 그리움을 먹는다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뒤로는 연대봉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큰 강이 굽이쳐 흐르던 그곳엔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방앗간 집이 하나 있었다. 기차가 드나들던 대관 역 앞에 자리 잡아 이름은 대관 역 방앗간 집. 때가 되면 산에서 밭으로, 밭에서 강으로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먹거리들이 방앗간 집 7남매의 뼈와 살이 되어주었다. 담장을 따라 열을 맞춰 늘어선 장독대는 언제나 비는 일 없이 사시사철 제 역할을 다 했다.


 뛰어난 경관 때문에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던 그림 같던 그곳에 영실은 방앗간 집 6번째 여아로 태어났다. 영실은 자연이 주는 푸르름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풍요 속에서 레코드판을 돌리며 자라났다. 일찍이 귀가 깨인 탓. 귀뿐만이 아니라 눈도 부지런히 깨어 잘생긴 남자는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소녀가 있다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실이의 평화가 깨진 날은 한민족의 평화가 깨진 날. 1950년 6월 25일. 대관 역 방앗간 집은 인민군들의 급식소가 되었다. 레코드 소리를 대신해 멀리서 우리 편이 죽었는지, 우리 편이 죽였는지 모를 총성만 흘러나왔다. 영실이네 가족은 자신들의 피와 살이 되어주었던 땅의 영양소를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누군가의 아들일 군인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렇게 사람을 먹이면서 살리는 일이 영실이의 일과가 되었다.  


 전쟁은 영실이에게서 대부분의 것을 빼앗아 갔지만 한 가지, 빼앗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녀의 안목. 한시가 바쁜 전쟁통에서 밥을 퍼나르는 와중에도 영실에겐 본능적으로 잘생긴 남자를 알아보는 분별력이 있었다. 스물두 살. 사랑은 전쟁처럼 찾아왔으니 그녀는 탱크처럼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월남.


  복잡다단한 이유로 전쟁은 일어났으나 영실의 결정은 심플했다. 자신이 밥을 지어 먹이던 누군가의 아들, 자신의 땅에서 영양소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던 어느 잘생긴 사내. 그를 찾아 남으로 가야만 했다. 그는 전쟁을 위해 남한을 침공한 북한 장교였다. 영실은 지체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처녀에게 사랑을 이루는 거 말고는 시급한 일이 없었을 테니.


3번.  


이것은 영실이 하늘에 빚진 목숨 값이었다. 영실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끊임없이 붙잡혔다. 한 번은 옷고름 속에 몰래 여민 쌈짓돈을 잃었고, 또 한 번은 자신과 함께 남쪽나라의 희망을 품었던 동무를 잃었고, 마지막 한 번은 목숨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남한이었다. 전쟁보다 무섭고 목숨보다 귀한 사랑을 위해.


 영실이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가 남한에서 그 북한 장교를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잘 된 일이다. 그녀가 장교가 아닌 가난한 인민군이었던 우리 할아버지를 만난 덕에, 우리 아버지를 낳은 덕에 나도 태어날 수 있었으니.


 김영실, 그녀는 나의 할머니이자 20년을 한 방을 쓴 나의 룸메이트다.






 태어나 보니 영실은 나를 입히고 먹이고 있었다. 어린 나와 늙은 영실은 같이 있어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내가 탄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늘 분주했다. 그들은 어린 나에겐 아주 가끔 엄마였고 아주 가끔 아빠였다. 나의 엄마가 되어주고 나의 아빠가 되어준 것은 모두 늙은 영실이었다.


 나의 유년시절은 영실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 화투를 치며 화해하고, 배가 고파 함께 밥상을 차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기억 속 나와 영실의 다정한 장면들은 모두 그녀와 함께 밥상을 차리는 순간들. 아마도 요리는 어린 손녀와 늙은 할미가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유쾌한 놀이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영실이와 김을 구웠다.

짭조름한 바다에서 한껏 건져와 햇빛에 잘 말린 네모 반듯한 김은 일종의 캔버스였다. 신문지를 펴준 자리에 영실이 넓고 딱딱한 플라스틱 붓으로 참기름 묻혀 검은 캔버스에 윤기를 내면, 나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간질거리는 코를 킁킁대며 맛소금 한 꼬집을 눈가루 뿌리듯 솔솔 뿌려댔다. 영실은 탑을 쌓듯 새 김을 얹고 기름 칠을 하고 나는 그 위에 다시 소금을 뿌리고... 둘이서 다섯 식구 먹을 분량을 한참 넘길 때까지 그 과정을 반복했다. 김이 가득 쌓이면 살짝 달군 프라이팬에 김의 앞 뒷면을 골고루 구웠다. 춤추듯 리드미컬한 박자를 타며 구워주는 게 포인트. 그래야 나도 지루하지 않고 김도 타지 않았다.  


 "짜다야, 이따가 밥이랑 먹어라."

 김을 소고기처럼 구운 동시에 바로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나에게 영실은 말했다.

 "아니야, 이따가는 맛이 없어. 지금 이렇게 먹어야 맛있어."

어린 나이지만 구운 김을 탁월하게 먹을 줄 아는 나였다.


 그러면 영실은 찬물에 당신의 오른손을 잠시 담갔다 밥통을 열고 갓 지어낸 뜨거운 밥알들을 거침없이 뭉치기 시작했다. 먹기 좋은 초밥용 사이즈로. 방금 지어 찰기가 도는 맨밥은 어쩐 일인지 조미가 된 것처럼 달고 고소한 맛이 났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갓 지은 밥을 방금 구운 김에 살포시 덮어 내 입으로 넣어주면, 나는 오동통한 배를 개구리처럼 내밀며 열 개고 스무 개고 끝없이 받아먹었다. 내 속도에 맞추기 위해 뜨거운 밥통 속을 수십 번 오가던 영실의 손은 허겁지겁 붉어졌다. 내 배가 곯아질 때마다 영실은 피난민 먹이듯 재빠르고도 정성스레 나를 먹였다.


 나는 영실이와 메주도 쑤었다.

영실이가 푹 삶은 콩을 커다란 포대자루에 넣어주면 나는 두꺼운 양말을 신고 그 위에 올라가 잘근잘근 콩들을 밟았다. 이것은 일종의 찰흙놀이와도 같았는데 손이 아닌 발로,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닌 형태를 없앤다는 점이 달랐다. 수많은 콩들의 형태가 무너져 하나의 덩어리가 되기까지 나는 그 위에서 껑충껑충 춤도 췄다가 제자리 달리기도 했다가 나중에는 발뒤꿈치에 힘을 주어 밀듯이 밟아 주어야 한다는 걸 스스로 터득하기도 했다. 양말은 제아무리 두꺼워도 콩들이 내뿜는 열기를 그대로 흡수했고 누런빛 콩물이 들었다. 나는 뜨겁게 콩물이 든 발을 붙잡고 "할머니 이거 봐라 똥 밟았다" 깔깔거렸다.      


 할머니와 손녀의 야무진 발재간으로 콩들이 충분히 으깨지면 다음은 덩어리로 빚어 줄 차례다. 손으로 통통통 쳐주며 네모 반듯하게 모양을 잡아주었다. 당시에 우리 집은 아파트였기에 메주를 말린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영실은 굴하지 않고 메주를 볏짚으로 묶어내 베란다에 걸어두고 그러고도 남은 메주들은 우리가 자는 안방 한구석에 볏짚을 깔아 말려주었다.


 잘 마른 메주는 쩍쩍 갈라지며 그 사이사이로 곰팡이 꽃을 피우는데 그 냄새며 생김새가 여간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이 곰팡이들이 장맛을 좌우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남들과는 다른 우리 집의 쓰임이 불만이면서도 영실이가 메주로 담근 고추장과 된장의 맛을 보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다음 해에도 삶은 콩들을 콩콩콩 밟았다.


 메주로 담근 장들을 보관하기 위해 베란다에는 큰 장독대가 줄지어 있었다. 밥상을 차릴 때마다 나는 냉장고가 아닌 장독대에서 국자로 장을 퍼내 영실에게 주었다. 마치, 영실이 어린 시절 북쪽 나라에서 그러하던 것처럼. 어쩌면 영실은 베란다에 줄지어 있는 장독대를 보면서 고향의 장독대를 보고 있는 것이겠구나 깨닫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영실과 만두도 빚었다.

 새해를 알리는 빨간 날은 영실과 내가 가장 바빠지는 날이었다. 만두는 고차원적인 만들기로써 시간과 손이 가장 많이 드는 놀이였다. 아니 사실, 이건 어린 나이에도 노동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소의 양과 피의 얇기, 손의 압력이 고루 균형을 이루어야 먹음직스러운 만두를 빚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실은 돼지고기에 밑간을 해서 볶아내고 신김치를 씻어내 잘게 썰었다. 흐물거리는 배춧잎을 헹구는 영실이가 나는 꼭 미용사 같았다.  


 "배추는 왜 머리를 감아야 해?"

 배추 미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만두 할 때 고춧가루가 있으면 안 되니까. 지지야 지지."

배추 미용사는 열심히 배추 머리를 헹구며 나에게 대답해주었다.


 베란다에는 음식용 탈수기가 따로 있었다. 영실이는 큰 헝겊 주머니에 두부를 가득 채워 탈수기에 탈탈탈 두부의 물기를 완전히 제거했다. 그리고 파와 숙주 당면을 잘게 다져 큰 대야에 한꺼번에 투하, 어마어마한 양의 만두소를 비벼냈다. 누가 보아도 다섯 식구가 먹을 양은 아닌 그 대단히 작업을 영실은 당연한 듯 해냈다. 냉동실에서는 1년 내내 그렇게 빚어낸 만두가 비상식량처럼 얼려져 있었다.


 영실이 소를 만드는 동안 나는 아빠가 완성한 밀가루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떼어내 가래떡 뽑듯 길게 모양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밀가루 분칠을 한 도마 위에서 한석봉 어머니가 떡을 썰듯 동전 크기로 띄엄띄엄 붙지 않게 썰어주었다. 엄마는 옆에서 밀대로 반죽에 구멍이 나지 않게 고루 힘을 주어 만두피를 만들어냈다. 완벽한 분업이었다.


 빚는 건 모두의 몫이었다. 오빠까지 우리 다섯 식구는 빙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아주 크고 못생긴 만두를. 어렸을 때부터 먹고 보아 온 만두의 형태가 이것뿐인지라 만두는 당연히 손바닥만치 투박하고 속이 터질 듯 꽈악 차야 되는 줄 알았지만 이것은 영실이가 고향에서부터 만들어 오던 이북식 만두였다.


 이제 와하는 이야기지만 이 만두는 정말 맛이 없었다.


 뭐든지 짜고 달고 간이 센 음식을 좋아하는 남한 소녀가 먹기에 북한 만두는 너무 멋이 없고 슴슴했다. 김치가 들어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연히 고기가 더 맛있으니까. 새해에 몇 차례, 만두에 고기만 넣자는 항의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새해 이른 아침이면 부엌에는 언제나 배추 미용사가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었다.


 쌀보다는 밀이 주식인 북한의 새해에는 떡국이 아닌 만둣국을 먹는다고, 북쪽의 겨울은 길고 추워 음식의 크기가 크고 간도 세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서부터였던 거 같다. 영실이의 만둣국에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이. 주먹만한 만두를 반으로 갈라 만두소에 조선간장을 부어 먹으면 그런대로 먹을만해 나는 잠자코 이북식 만두를 빚는데 일조했다.


요즘은 만두피를 사서 만들어 예쁜 모양의 한국식 만두가 되어버렸다.


 영실이 죽기 전 온 힘을 쏟아 마지막으로 한 일을 우리에게 고향집 주소를 적어주는 것이었다.


평양북동삭주군외남면대관동원모루연대복조등학교역대봉앞기차길앞

 

노년이 되어 경로대학에서 배운 어설픈 한글로, 영실은 살아있는 마지막 힘을 고향을 기억하고 글자로 적어내는 데에 썼다. 20년 동안 자신을 길러준 땅을 그리워하느라, 60년이라는 세월을 그곳에서 먹고 자란 음식을 지어먹는데 쓴 것처럼. 고향에서 태어나 평생을 고향에서만 먹고 자란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마음의 우물, 죽는 순간까지 마르지 않는 그리움의 웅덩이였다.  


 고향은 그만큼이나 애틋하고

 그곳에 음식은 그만큼이나 위로가 된다.


먹고 자란 음식에는 먹고 자란 추억이 있고, 살을 부대끼던 사람들이 있고, 꼭 다시 돌아가고픈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입맛이 없을 때마다 양푼에 밥을 가득 퍼서 위생장갑을 낀 손으로 구운 김을 싸 먹는다. 명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여전히 내 입맛엔 맞지 않는 이북식 만두를 빚어낸다. 새해에는 떡국 대신 떡만둣국을 먹고 양념장은 꼭 조선간장을 쓴다. 영실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영실이와 함께 먹었던 음식으로 밥상을 차린다. 그렇게 영실이에 대한 그리움을 먹는다.


 나를 키워낸 영실이 먹고 자란 땅.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영실이의 고향 음식들을 실컷 먹어볼 작정이다. 비뚤 빼뚤인 그녀의 유언 같은 주소를 들고서. 하늘에서 영실이가 차리는 밥상에 더 이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차려지지 않도록.  

 

 나의 할머니이자 나의 20년 지기 룸메이트. 영실이가 지어준 밥을 먹고 자랐다. 그 힘으로 그녀에 대한 글을 써본다. 그 힘으로 서른두 번째 무더위를 또 이겨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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