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urs, 2003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 ‘짓’을 배워야 한다. 사람 짓을 해야만 한다. 그 짓이라는 건 시대별로, 문화별로 달라지지만,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 탓에 여론이 거세게 형성되어 멸문지화 당하는 이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발생하고 있으니 각기 다른 세 개의 시공간에 놓인 인물들을 다룸에도 하나의 궤로 연결시킬 수 있음이 놀라운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디 아워스>는 1923년 잉글랜드 리치먼드의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1941년 잉글랜드 서식스의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 2001년 뉴욕의 클라리사 본(메릴 스트립)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사람 짓을 하려다가 자신의 내면에 발생한, 발생한 줄도 몰랐던 커다란 구멍을 바라보는 영화다.
먹고 싶은 걸 먹어도, 가고 싶은 곳엘 가도, 좋아하는 이들과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무언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본인이 원해서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면, 그때의 공허는 대체 어떻게 채워야 할까. 평일 점심엔 간단하게 편의점이나 구내식당에서 때우고 주말 저녁엔 값비싼 오마카세를 먹는 아이러니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하루 중 저녁에 아름다운 시간이 됐으면 하는 소망을 지닌다. 그리고 그런 수요를 채워주기 위한 장치들은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버지나아와 리차드(에드 해리스)는 죽기로 한다. 클라리스와 로라는 그런 결심을 했던 것 같으나 살기로 한다. 죽음을 택한 이들은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죽음으로 도망친 것이라고 봐도 될까. 혹은 그 결심을 했다가 포기한 이들을 그렇게 봐도 될까. 영화의 오프닝에서 버지니아는 주머니에 돌을 채워 넣고 천천히 강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인생의 모든 행복이 당신 덕분이라는 거야.”... “이제 내게 남은 건 오직 당신의 그 상냥함 뿐이야. 더 이상 당신 삶을 망칠 순 없어.”라고 말하며.
<디 아워스>는 전체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심지어 버지니아가 죽기 위해 강으로 나아갈 때에도, 윤슬이 찬란하게 빛났다. 암막 커튼으로 온 방을 뒤덮어 햇빛을 모두 차단하고자 했던 리차드도 마지막 순간엔 그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햇빛을 갈망했다. <디 아워스>는 전체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것은 유충이 번데기를 벗고 나와 세상을 마주하기 직전의 상태 같다. 버지니아와 로라와 클라리사는 우울감에 빠져 허덕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 중 영화가 조명하는 몇 가지 부분 때문에 우울해하지만, 끝내 삶 전체를 바라보게 되는 과정은 라캉의 거울단계 같다. 거울단계는 생후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의 거울을 통한 동일시, 그로 인한 자아의 형성을 설명한다. 아직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에겐 자신의 신체 부분이 하나로 인지되지 못한다. 그러다 부모의 도움으로 거울 앞에 서면 비로소 그 전체를 하나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를 슬프게 만드는 몇 가지의 것들이 내 삶의 전부인 것 같지만, 삶 그 자체인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오랜 시간 에이즈로 고생하던 리처드를 간병해 오던 클라리사에게 리처드가 삶의 전부가 아닐 수 있고, 로라에게 어린 아들과 남편이 삶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 아픈 본인을 위해 교외로 이사를 결심한 남편 레너드(스티븐 딜레인)의 뜻을 따라주는 것이 버지니아의 삶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
그 아닐 수 있음을 마침내 깨닫고 어떤 선택을 한 이들에게 피하거나 쫓기어 달아남이라는 뜻의 도망(逃亡)은 그래서 성립될 수 없다. 쫓기거나 달아나는 것에 장해물이 될 선택을 왜 한단 말인가. 몇 해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누군가는 유서에서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날 미워했다. 끊기는 기억을 붙들고 아무리 정신 차리라고 소리쳐 봐도 답은 없었다. 막히는 숨을 틔어줄 수 없다면 차라리 멈추는 게 나아. 날 책임질 수 있는 건 누구인지 물었다. 너뿐이야. 난 오롯이 혼자였다. 끝낸다는 말은 쉽다. 끝내기는 어렵다. 그 어려움에 여태껏 살았다. 도망치고 싶은 거라 했다. 맞아. 난 도망치고 싶었어. 나에게서. 너에게서.”라 말했다.
얼굴에 핏기도 없고 내내 유약하게만 보이던 버지니아의 눈동자에 힘이 실리던 순간, 남편 브라운에게 자신의 상태를 단 한 번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던 로라가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선택에 대해 계속해서 감내(bare)해야만 한다며, 그래도 “난 죽음 속에서 삶을 택했어요.”라 말할 때. 그래서 리차드를 떠나보내고 내내 곁을 지켜주고 있던 샐리(앨리슨 제니)를 똑바로 응시할 때. 이제 막 세상에 나온 태아가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는 것만 같았다.
“기억이란 재봉사이고, 더군다나 변덕스러운 재봉사이다. 기억은 안팎으로, 위아래로, 여기저기로 바늘을 놀린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이후에 무엇이 이어질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탁자에 앉거나 잉크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작도 서로 무관한 수 천 개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뒤흔들어 놓아, 때로는 밝은 조각이, 때로는 어두운 조각이 빨랫줄에 걸린 열네 명 가족의 속옷이 돌풍에 나부끼듯 매달려 까닥이고 펄럭이다가 떨어진다.” -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82p.
클라리사와 리처드에게 어느 날 해변에서의 아침에 마주한 서로의 인상은, 로라와 키티에게 둘의 키스는, 버지니아가 레너드에게 받았던 그 따뜻한 마음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이후 자신의 삶을 그렇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때로, 그것이 필요한 시기가 지났음에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아 정작 그때 손에 집어 들어야 할 것을 놓치고 지나 평생을 후회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순간은 새로 태어난 것과 다름 아닐 것이다. <디 아워스>에 등장하는 세 여인과, 그리고 세 여인을 묶어주는 버지니아 울프의 책 <댈러웨이 부인> 속 댈러웨이 부인까지, 그들은 할 수 있다면 또다시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가 성장기를 거쳐 청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신체가 성장하듯, 자아 역시 그에 못지않게 성장하고 확장시키고 싶은 것은 당연할 것인데, 과거의 어떤 순간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죽음이 아닐까. 버지니아와 로라와 클라리사는 그 존재로서, 영화에서 조명하는 그 시간들로서 나를 위로한다. <디 아워스>는 전체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나는 오히려 삶에의 동력을 얻는다.
하루 중 저녁이 화려한 시간이 됐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 이들과 다르게, 버지니아는, 로라와 클라리사는 죽음이 아닌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길고 힘들었던 고민 후에 결심한 후 펜을 쥐기에도 손이 떨렸던 그녀가 힘을 내어 발걸음을 내딛던 순간, 우리는 볼 수 없었지만 남편과 아이의 아침을 차려주고 집을 나서던 날을 회고하는 순간, 그녀가 “우린 원래 그렇게 살아. 사람은 그렇게 살아. 서로를 위해 살아가지.”라며 타이르는 순간은 사실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고, 보내고 있는 시간이다. 자기 스스로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그들의 눈은 더없이 반짝거렸다. 궁금하다. 나도 저런 눈을 가질 수 있을까.
버지니아는 글을 쓰고, 로라는 글을 읽고, 클라리사는 그것을 엮는 일을 한다. 수백 년을 걸쳐 글이라는 매개로써 그들은 함께 호흡한다. 영화를 보고, 그것에 대해 미약하나마 무언가 적어보려는 시도는 나 역시 그들과 호흡하고자 함일까. 얼어붙은 마음에 입을 맞춰줄 이가, 케이크를 만들어 줄 이가,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줄 이를 보았으니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일까. <디 아워스>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아슬하게 등껍질에서 고개를 내민 내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궁금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인상을 줄 수 있을까.
“의미가 있었을까? 자신의 삶을 필연적으로 완전히 끝내는 게 의미 있던 행동일까? 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감에 그녀는 억울했을까? 죽음이 삶을 완전히 끝냈음에 위로를 받진 않았을까? 죽는 것도 가능하다. 죽는 것도 가능하다.” 로라가 호텔방을 잡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죽음을 결심하는 순간, 아니 이미 결심한 후 읽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버지니아가 “여주인공을 죽이려고 했는데, 마음을 바꿨어(I changed my mind).”라 말하고, 로라는 그 죽음 속에서 삶을 택한다.
보고, 읽고, 쓰다 보니 어느새 로라의 나이대가 됐다. 버지니아의 나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클라리사의 나이도 언젠가 올 것이다. 1923년의 버지니아에겐 오지 않은 로라의 1941년이 있고, 꿈꿀 수도 없었을 2001년이 클라리사에게 있다. 1923년의 버지니아에겐 불가능했던 아이를 버릴 수 있는 선택지와 이혼이 가능했던 로라의 삶이고, 다시 버지니아에겐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동성의 연인과 함께하는 클라리사의 삶이 있다. 버지니아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양고기 파이를 준비하려 했으나 예정보다 그들이 너무 일찍 도착했고, 로라 역시 케이크를 준비했지만 마음처럼 잘 만들지 못했다. 클라리사는 근사한 파티를 준비했으나 미처 시작도 못하고 음식을 다 쓰레기통에 버리고야 말았다. 생각했던 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계획했던 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들판에 핀 꽃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자 했는데, 사람에겐 꺾이고 의도치도 않았던 포장지와 리본으로 한껏 치장해야만 하는데, 그 짓에 익질 않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내가 평생 가볼 수 없는 16세기로 데려다주거나, 가늠할 수 없는 3,000년을 관통하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를 보는 것도 귀한 경험이지만, 내가 사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실감하게 하는 영화는 평생에 몇 없을 것이다. 로라와 버지니아, 클라리사가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며 “세상의 어떤 짝도 우리보다 행복하진 않았겠지.”라는 말을 나누는 시간(hour)들이 모인 <디 아워스>(The Hours)가 내게 각별한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디 아워스>를 보는 누군가에게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사랑하는 레너드
삶을 정면으로 보고
언제나 삶을 정면으로 보는 것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것을 깨달으며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런 후에 접어두는 것
레너드
우리가 함께한 세월, 그 세월은 영원할 거야
영원한 그 사랑
영원한 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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