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과 젠더, 그리고 ‘벚꽃 대선’에 부쳐
내 별명은 게이였다. 시작은 옷차림. 중학교에서 소풍을 가는 날, 원색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란 카디건.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만큼 예쁜 옷이었지만, 그 뒤로 그런 옷을 입지 않는다. 이제는 ‘남자다운’ 옷차림을 한다는 말이다. 그 둘의 차이는 재밌다. 격식을 갖춘 옷을 입으면, 택시기사가 반말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빨리 나가라고 신경질을 내며, 몸을 함부로 잡아 밀치는 사람도 없다. 이 ‘평범한’ 성인 남성 코스프레로 얻는 권력이 새삼 편하다. 어디서든 더 자유로운 사람이 권력자라는 생각을 한다.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하지만 이 생각 앞에, 자주 멍해진다.
학교에서 배우는 남성성
정말 자유로워진 것일까. 십 대에는 게이라는 말을 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의도도 같았다. 그 말이 싫어서, 더 남자다운 척을 했다. 그때 알던 아이들에게 ‘남자다움’이란 사실 간단했다. 만화에 나오는 ‘서비스 컷’을 돌려보는 것이다. 대부분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너 게이냐”고 누군가 장난기를 머금은 얼굴로 물으면, “역겹다”고 답해야 하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게이를 색출하기. 이 두 가지는 그 후로도 겪은 남성 사회에서 지겹게 반복되는 레퍼토리였다.
드라마 속의 송중기는 “그 어려운 걸 제가 자꾸 해냅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간단한 것을 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남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태생부터 운동을 못 하고, 만화보다는 ‘여사친’의 파우치가 궁금했던 나는 너무 어설펐다. 매 쉬는 시간에 만화를 같이 보자는 아이들에게 “미안, 아픈 것 같아”라며, 책상에서 잠을 자는 척을 했다. 그렇게 은근히 따돌림을 받다가, 자퇴서를 냈다. 여기 말고, 이런 나를 환영해 주는 곳이 있을 것 같아서다.
페미니스트를 만났지만
페미니스트를 만났다. 십 대를 갓 지나쳐 당도한 시민단체에서였다. 학교와 기성 사회와는 반대에 있는 곳. 좋은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이쪽이 내 길일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소수자, 사회, 청년과 같은 단어를 숨소리만큼이나 내뱉었다. 그 와중에 그는 “남자, 여자 것이 어디 있어.”라고 핀잔하는 사람이었다. 화려한 글을 썼고, “저 사람은 말을 하기 위해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할 만큼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나는 이 사람 옆에 붙어 있으면, 십 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기대는 나와 다른 남자 선배를 엮으며, 그가 “이상하다”고 웃을 때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도 ‘게이 러브라인’은 단골 웃음거리였다. 회의 때도, 단합 MT에서도, 사적인 모임에서도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그들은 즐겼다. “그것은 유머니까. 그는 언변이 뛰어난 만큼, 유머에도 감각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따라서 웃었다. 가짜로 짓는 웃음을 들키기 싫어, 일부러 더 크게 웃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나를 놀리는데 재미를 붙였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아무 말 대잔치가 더 크게 열린 것이다.
한번은 위계가 없는 조직문화를 만들자고 모인 자리에서였다. 그곳에서조차 “그러게 OO씨 왜 나댔어요.”라고 그가 내게 진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나이 권력에, 직장 내 위계였으리라. 내가 학교폭력과 가정폭력 생존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콕 짚어 말하곤 했다. “OO씨 가족과 십 대 친구가 보고 싶다.”고. 그런 말 앞에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내며, 다시 십 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권력 행동과 소수자를 지워내는 유머를 즐기는 ‘페미니스트’였다.
짧은 포옹 같은 대화
나는 대체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기성 사회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면, 내게 맞는 곳은 어디일까. 그 단체를 나온 후, 집단과 ‘좋은 일’을 한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이따금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다. 사회적 기업, NGO, 진보정당 등에 실망한 사람들. 아니, 대안을 찾아온 곳에서 그 전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친구들. 그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느낀다. 갈등과 자기모순, 말하기를 주저하는 표정, 그렇게 멋진 사람들이 정말 내게 그런 일을 했는지 믿기 힘들어 자신조차도 의심하는 마음. 숨소리마다 그들도 나와 같은 모습이 엿보인다. 그들과의 짧은 포옹 같은 대화, 시간의 흐름을 전복시키는 위로, 개별 피해자들의 연대. 난 그것만을 믿게 되었다.
큰일을 끝냈으니, 고기 회식을 하러 가자던 시민단체. 그곳에 있을 때보다 채식을 하며 좀 더 맛있는 두부를 고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지금이 더 페미니스트답다고 생각한다. 나와 맞는 곳을 꿈꾸며 자퇴서를 냈던 십 대보다, 정신과 진료를 안전하게 받을 수 있게 된 지금에서야 더 먼 미래를 기약한다. 이제는 병역거부를 생각하곤 한다. 소견서에 쓸 말을 상상하는 것은 퍽 재밌다. 학교폭력에서 벗어나 청소년 상담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 폭력성을 조장하는 곳에서 훈련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꽤 멋진 소견서이자, 인생이 될 것만 같다. 어차피 젠더퀴어이니 게이라는 말이 절반은 맞았던 셈이라고, 그 일들을 혼자서 웃어 넘겨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정된 남성성에서 이제 자유로워졌다고, 그 사람과는 달리 소수자 감수성을 갖춘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다. 학교폭력을 겪은 친구는 드라마를 보며 사람들과 밥 먹는 법을 연습했다고 고백하고, 그와 같은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한다. 그 단체에서 나온 뒤, 회의 자리에선 말하기 전부터 몸이 떨린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병역거부를 할 거예요“라고 눈을 빛내며 이야기하지만, 감옥에 가는 것은 표현할 형용사를 찾을 수도 없을 만큼 두렵다.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면서, 아직도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찌질한’ 한국 남자의 전형처럼 행동하고는, “부끄러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한 업보에, 자부심이라고는 날 데가 없는 불편한 삶이다.
그렇게 조금 더 자유롭게
그럼에도 다시 생각한다. 그 단체에 필요했던 것은 “우리는 여성주의적이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라는 자부심이 아니었다고. 우리도 끊임없이 권력 행동을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일베하는 애들’이 바깥의 적이 아니라, 우리도 혐오의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계속 살펴야 했다. 계속 경계하면서 농담에, 말에, 행동에 소수자가 지워지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불편해하는 것. 그럴 때 그 단체와 내가 비로소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친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그렇게 불편하게,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촛불 혁명 완수, 적폐청산이라는 슬로건이 슬몃슬몃 보이는 벚꽃 대선이 오늘이다. 그 와중에 나는 남자인 몸을 가지고, 봄 유행인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싶어 난리다. 문재인의 혐오 발언에 맞서, 성 소수자에 대해 덜 차별적인 심상정을 지지한다는 글이 SNS에 올라오기도 한다. 그것을 보고서야 나는 과거를 조금이나마 청산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 비로소 불편하게, 조금씩 더 자유로워진다. 유력 당선 후보는 따로 있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지는 것. 모든 시간을 거쳐, 이 글을 겨우 쓸 수 있는 것. 그렇게 어렴풋이 기억하는 홍상수 영화의 대사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며, 조금씩 달라지는 이것을 인생이라 불러도 좋을지” 고민하며 산다.
글. 서아람(aramstudio@daum.net)
특성이미지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이 글은 고함20(www.goham20.com)에도 실렸습니다.
*이 글은 대선이 있었던 5월 9일의 기사를 재발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