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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걀머리 Sep 18. 2023

소설은 기후문제를 다룰 수 없다?

기후변화와 문학

생각 정리를 위한 뇌피셜의 계속.

 

<의문을 가지게 된 계기>

한국 소설은 당대의 사회문제들에 문제제기, 질문하기, 예언자적 역할을 충실히 담당해 왔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 계급 문제, 노동운동, 페미니즘 등 당대의 사회문제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리드하는 역할을 해왔다. 90년대 개인주의적, 사변적  소설들조차도 권위주의적 문화를 벗어나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시대적 변화에 응답한 결과다.

그런데 소설은 기후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침묵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특히나 환경 문제가 피부에 와닿게 심각해진 2000년대 이후에도 소설은 환경파괴와 기후문제를 사회적 아젠다로 끌어내지 못했다. 기후소설은 양적으로도 적었지만 SF, 장르 소설로 분류되어 주류 문학 출판사들의 관심과 문학상에서 소외되어 왔다. 심지어 팬데믹 시기에도 팬데믹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 이상으로 나아가 체제의 문제로 분석해내는 소설은 드물었다.  

주류 소설계가 기후 문제만큼은 예언자적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가 무얼까? 왜 오히려 뒤처지나? 거의 직무유기 같은 무관심과 벙어리와 마비 상태로 남아 있나? 출판사나 작가들은 이 문제에 왜 이리 무관심한가(혹은 그렇게 보이는가)?


<어설픈 시도, 개인적 경험>

* 내가 기후 관련 소설을 써보려고 시도했을 때 “소재주의”라는 평과, 환경 문제로 소설을 쓸 때 소재주의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충고를 들었다. 이 충고가 무척 흥미로웠다. 습작품 자체는 나 개인이 더 갈고닦아서 개작하면 될 일이지만, 동시에 소설쓰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치나 환경문제는 소재주의가 되기 쉽다”는 말을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은 가장 유연하고 자유로운 장르가 아닌가? 그런데 특정한 문제를 다룰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다니?


그후 동시대 소설들을 읽어보면서 의문 혹은 답답함은 더 커졌다. 습작생으로서 읽게 되는 주류 소설들, 그해의 문학상을 받는 소설들 중에 기후소설을 보기가 힘들었다. 기후 소설들은 장르 소설로 주변화되어 순소설계에서 외면받이제 막 소극적으로 포용되기 시작한 듯했다. 기후문제가 인류의 절멸을 일으킬수도 있다는 심각한 논의가 한쪽에서는 계속되는데 문학은 아직도 개인/가족 차원의 문제에 집착할까, 등장인물들이 진취적인 면은 하나도 없이 자폐적일까(물론 사회과학서가 아니니까 경쾌한 문제해결을 추구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도 1990~2000년대의 아젠다에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일까?  물론 모든 소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습작생으로서 읽게 되는 주류 소설들, 문학상들을 받는 소설의 주인공들이나 작가들은 어쨌든 기존 시스템 안 자장 안에서 나름의 태평하고 부르주아적인 삶을 영위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기후나 빈곤 문제 등 내가 두렵고 궁금해하는 문제를 함께 탐구하는듯한 느낌을 받지 못해 소설을 읽으며 소외감에 오래 시달렸다. (나의 부족한 독서 때문에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지금은 일단 가설을 세우기 위해 뇌피셜을 주절거리고 있다.앞으로 공부하면서 나 자신의 오류도 바로잡고 싶다.)


나는 계속 궁금한 채였다. 내가 관심있는 기후문제들은 소설 안에 녹일 수 있을까? 내가 알기로 소설은 아주 유연한 장르인데, 왜 기후문제들은 녹아들기 힘들까? 소설계는 왜 (기후문제에 관심도 없고 늦어터진) TV 뉴스보다도 더 소극적으로 기후문제를 다루는가. 현대소설안의 작동 원리 중에 정치나 환경 문제 등을 흡수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리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점점 내 안에서 커졌다.


<대혼란의 시대를 시작으로>

그러던 와중에 호주 여행을 갔다. 거기서 전혀 기대치 않았던 수확을 얻었다. 호주의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서 자주 기후문제에 대한 기사를 우리나라에서보다 훨씬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훨씬 생활화된 느낌이었다. 어느날 신문의 칼럼에서 이런 헤드라인이 눈에 띄었다.

“기후위기는 문학적 상상력의 위기다”

칼럼은  자본주의의 기반이 된 근대적 담론이 문학이라는 장르의 DNA라는 것, 그리고 소설을 마비시켜 온 것과 같은 바로 그 담론이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우리의 인식과 문제해결능력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 그러니 (근대문학을 극복한) 새로운 문학적 상상력이 기후위기를 극복하는데 왜 필수적인지 논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궁금한 기후와 문학의 문제를 이렇게 본격적으로 논하는 글을 드디어 만난 것이었다. 칼럼의 저자는 아미타브 고시, 인도계 작가였는데 찾아보니 한국에도 그의 책 <대혼란의 시대><육두구의 저주>가 번역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고쉬의 책을 시작으로, 비평서, 기사들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문학과 기후 문제를 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초보단계지만 그런 글들을 읽고 나 혼자 안고 있는줄 알았던 두려움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분이 들 때, 그리고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배울 때 큰 위로가 된다. 외로움이 사라진다. 그래서 더 읽고 연구하고 나만의 이야기도 하고 싶다.


하나 더 주지하고 싶은 것이 있다. 호주에 가자마자, 그냥 여행자로서 지나가던 일상에서 내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주의 미디어에는 환경문제에 대한 논의가 널려 있었다. 환경문제에 관심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과학적인 분석이나 종말론적인 예측만 있었다는 게 아니다. 환경우울증처럼 좀 더 일상적이고 지금 여기서 일반인들이 겪을 수 있는 심리적인 대응에 대한 글도 자주 보였다. 그렇게 노출되고 정보가 골고루 나누어질 때 문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집단지성이 형성될 것이다. 인간은 함께 문제를 극복하면서 수십 만년을 진화해왔고, 이번 위기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지성적, 감성적, 집단적 지혜를 총동원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한국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사회구성원끼리 기후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024년 중반인 지금도 아파트 가격, 명품 소비, 대기업 취직이 삶의 목표 전부인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면 나는 더 두렵다. 공동체의 지혜 속에서 편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불가능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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