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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Feb 09. 2019

<성학십도: 자기 구원의 가이드 맵>

퇴계 이황 편집, 한형조 독해

한형조 교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평생에 이 책을 읽게 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교수님께서 UW에 방문학자로 와 계신 덕분이다. 그분의 책에서 만난 유학의 말씀은 이상하게 달고 달았다. 누구를 통해 소개받느냐에 따라 그 본질의 맛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나 싶어 전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 책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 한 명을 못 찾아 인생 전부를 허비할 수도 있는 이 세상에서 좋은 책은 한 이틀의 사귐만으로도 수십 명을 한꺼번에 와르르 만날 수도 있다. 만나서 인생 전체에 쓰고도 남을 농도 높은 가치를 전수할 수도 있으니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책의 외형은 특이하다. 총 750페이지 이상에 웬만한 사전보다 더 두껍다. 묵직한 두께에 비해 책 사이즈가 작아 중반 이후로 갈수록 책을 반듯이 펼쳐 놓고 읽는 것조차 무리가 간다. 왜 책을 이렇게 만드셨을까?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되는 장점을 이용해 리딩의 스피드를 높이는 효과를 노린 걸까? 10장의 이야기를 두 권에 나누면 맥이 끊어질 것 같긴 하다. 아무튼 사전 같이 생긴 책을 손바닥 사이에 두고 한 장씩 넘기는 맛이 일반 책과는 색다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친근감이 가는 건 학창 시절 늘 손에 끼고 살았던 (때로는 쉬는 시간 눈을 부칠 때 무거운 머리를 누이기에 탄탄했던) 영어사전에서 받았던 기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파란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이 책을 읽어 보겠다는 엄두는 아예 맘속에 두지 않았었다. 페이지를 열면 곧바로 쏟아지는 한자 원문에서 받는 알레르기는 차치하고라도, 유학이라는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일 것 같은 동양 고전을 읽어 볼 마음의 동기가 없었던 게 솔직한 고백이다. 언필칭 (이건 한 교수님의 책에서 가장 빈도수 높은 단어가 아니었을까?), ‘유학’하면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건 부인하기 쉽지 않다. 더불어 공자가 죽어야 (또는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한국 사회에 공허하게 떠도는 메아리 같은 논쟁이 떠오른다. 인제 그만 공자를 책 속에 내버려 두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한 교수님을 북소리 강사로 정작 모셔 놨으니 책을 안 읽을 수는 없었다. 양심에 찔려 이분의 저서 중 훨씬 더 얇은 책 <왜 조선 유학인가?>를 편법 삼아 먼저 읽었다. 놀랍게도 그 책을 읽으며 나는 마치 만화책을 읽듯 키득거렸다. 그 기이한 경험 때문에 한 교수님의 인생 걸작 <성학십도>에 도전하게 되었고, 그 여정은 즐거운 유학의 향연에 한바탕 질퍽하게 놀다 온 느낌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시애틀에 내린 몇십 년 만의 폭설로 인한 이틀간의 휴교령 또한 완독을 도왔다. 


다시 말하건대 절대로 고리타분하지 않은 책이다. 아니 한 교수님의 독특한 현대 언어로 풀고 해설해 주신 유학이란 신선하다 못해 센세이션에 가까운 감흥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한 교수님의 깔끔하고도 생생한 언변이 읽기에 재밌다. 그분의 언어를 읽으면 딱딱할 수 있는 유학의 내용이 술술 읽히기까지 한다. 이 방대한 양의 유학 인문서가 이리 쉽게 읽힌다는 것만으로도 한 교수님의 책의 가치는 대단하다고 본다. 누가 가히 이렇게 유학을 풀이할 수 있을까? 한 교수님 만의 맛깔난 언어로 이분의 사고와 해설을 좇아 함께 책을 탐구하는 동안 참 재밌는 강사를 만나 신나게 강연을 듣고 깊은 영감을 받은 느낌이다. 기독교로 치면 부흥사에게 성령 충만한 설교를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상태에 비할 수 있을까? 


아무튼 이 책은 작금의 어지러운 난세에 개개인에게 꼭 필요한 삶의 기술을 낱낱이 전수하고 있다.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인간 삶의 혜안을 얻고 싶은 분들 모두에게 자신 있게 추천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자기 구원의 가이드맵’인 것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10년 넘게 이 책을 준비하신 한 교수님의 친절한 독해와 주석에 담긴 그 따뜻한 마음을 통해 구원은 멀지 않은 바로 내 안에 굉장히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 편향적인 독서평이라면, 약간 정신을 차리고 객관적으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성학십도 聖學十圖>라는 책은 성학(성리학, 유학)을 대표하는 10가지 그림(十圖)을 쉽게 풀이한 것이다. 조선 시대 선조 때 유학자 퇴계 이황이 주자학을 근거로 동양 고전에서 편집한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퇴계 이황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공자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주자학의 내용 중에서 임금 선조에게 전하고 싶은 열 가지 군왕의 도(道)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열 가지 그림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림이라기보다는 정리표나 요점 리스트라고 보는 게 적당하다. 뭔가 심오하고 성스런 학이 날아갈 듯한 그림을 상상하는 독자들은 나처럼 기대하지 말 것.  


한형조 교수님은 1568년 퇴계의 버전을 기본으로 했지만, 45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의 현대식 번역을 시도하셨다. 공자왈 맹자왈이 아닌 현대의 언어로 재치 있는 단어와 화법을 쓰신 번역은 의미 전달에 있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분의 해설을 직접 읽어봐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가 될 것이다. 진지함 속에 간간히 묻어나는 개방적인 생각? 절대 가벼운 언어를 사용한 게 아닌데, 머리로 애쓰며 이해하지 않아도 가슴에 쏙쏙 박혀오는 화법이라고 할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되고, 그래서 딱딱하지 않으며 유연한 사고가 느껴져 본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고 할까?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적이고 확실한 정공법을 쓰시기에 사이다처럼 시원하다고 할까? 거기에 위트와 재치가 섞인 해석도 얼굴에 미소를 종종 자아내게 한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질문과 반문에 이어지는 한 교수님의 고민의 흔적을 보며, 고전을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소득 중의 하나라도 본다.       


책의 구성은 원문의 원전을 참고하기 위해 한자 원문을 제일 처음에 싣고, 그다음에는 한자 원문을 읽을 때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하는지 도움을 주는 현토를 달아 두었으며, 그러고 나서 생생한 현재의 우리말로 번역을 한 후 뒤에 또다시 주석과 해설을 달았다. 각각의 그림을 한 챕터로 해서 총 10장으로 아래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1장 <태극 > 인간의 기원

2장 <서명 西> 인간의 소명

3장 <소학 > 전략 그리고 기초 훈련

4장 <대학 > 교육의 프로그램

5장 <백록동규 百鹿洞規> 지식 그리고 실천

6장 <심통성정 心統性情> 마음의 본질과 역동을 말한다

7장 <인설 仁說> 성장이냐 쇠락이냐

8장 <심학 心學> 마음의 실전 수련

9장 <경재잠 > 주시와 집중의 힘

10장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 선비의 일과 


읽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해설과 원전의 내용 때문에 저절로 학습의 효율이 높아진다. 이 자리에서 책에 대한 각 장의 내용을 정리할 마음은 없다. 다만, 내가 이 책을 읽은 후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하게 되었던 점 딱 한 가지만 나누도록 하겠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바람직한 덕목이 인(), 즉 사랑에 있다는 것이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이웃에게 시키지 말라는 율법은 비단 유교와 기독교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인문과 종교적 전통들이 한 목소리로 역설하는 공유 지반이라는 깨달음이 새삼 놀랍다. 왜냐? 인을 이루기 위해 제시된 유교의 수많은 세부 가르침들이 기독교인이 성령의 힘으로 성화되어 가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매우 큰 차이!) 그 성화의 과정에 개입된 절대자의 유무에 있을 것이다.  


유교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다시 바라보니, 기독교는 신성과 인성이 상하로 구분되는 매우 수직적인 구조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전에도 알고 있는 바였지만, 유교와 비교해서 보니 기독교의 교리가 더 명확하게 보인다. 기독교나 유교나 결국엔 인간의 최고 가치인 인과 선,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자는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다만, 기독교는 인간이 신성을 향해 성화해 가는 과정이 초월적 신에 매우 의존적이다. 맹목적이기도 하다. 또 인간의 의나 선의 행실이 아닌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받게 되는 구원이라는 의미에서 반 인간적이기도 하다.  


반면, 유교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최대한 잘 살려 나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자기 수련이면 족하다. 물론 그것이 쉬운 길은 아니다. 누구를 의존하지 않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통한 공부와 성찰, 그리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매우 현실적인 삶의 지침서가 된다. 죽음마저도 우주의 섭리를 통해 삶의 한 사이클 안에서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다. 생성했다 소멸하는 음양의 한 원리일 뿐,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필요 없기에 구원은 어느 누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 이 결론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기독교 신자인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라고 할까? 그래서 유교를 종교가 아닌 유학 내지는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인지 모르겠다. 반면 기독교는 죽음 이후의 삶이 현재의 삶 이상으로 중요하고, 그것을 보장하는 절대자에 종교적으로 의존해 믿음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인 한 교수님이나 이 책의 원저자 퇴계 이황 또는 주자학의 주자와 공자가 의도한 내용과 전혀 무관하게 책을 읽었을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 신자인 내게 다가온 유학이 매우 유혹적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식대로 한마디로 요약을 강행해도 괜찮다면, 이 책은 신 없이도 괜찮은 인간이 되는 법을 은근하게 깨우쳐 주고 있는데 그 길은 교회를 매주 나가는 것보다 조금 더 어렵다는 것. ‘믿습니다’의 구호나 입술에 떠도는 기도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 마음속 깊은 곳까지 (뼛속까지) 변화가 와야 한다. 그래야 쓸만한 인간이 비로소 된다. 어쩌면 이 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를 비하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교회 다니고 헌금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성화가 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차라리 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느림보 유학자가 되는 게 참된 인생의 경주에서 더 빨리 성장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흔해 빠진 처세술이나 자기 계발서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더 배울 게 없다고 무시했던 유교의 가르침은 인간 본성을 제대로 교육하는 튼실한 자양분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물론 권위적인 면과 가부장적인 옛것의 가르침이 없지 않다. 요즘처럼 남녀 모든 인간의 평등을 논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덕목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와 관계를 논함에 있어서는 아직도 유용한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또 그 탐구와 공부의 길은 얼마나 진지하고 고귀한지 옛 성현들이 가르쳐준 내용에 깊이 감탄해 마지않게 된다.   


성 윤리가 부재하고 사리사욕과 권모술수가 가득한 이기주의와 몰인정이 팽배한 이 절대 경쟁 사회에 우리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말하며 서로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우기 전에 조용히 유교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찬찬히 묵상해 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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