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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Feb 24. 2019

<시련 The Crucible>

아서 밀러

저녁에 갑자기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미국에 아는 교수 없냐며 다급하게 누군가 도움을 받을 수 없을까 하는 연락이었다. 친구의 친구가 한국에서 교수로 지내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자리를 옮기고 싶어 구직을 알아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는 교수가 없다고 말하고 거기서 끝냈어야 했는데, 실력은 대단한데 자신을 밀어줄 만한 교수가 없다는 친구의 말에 이상한 관심이 발동해 계속 대화를 이어가다 그만 서로 마음만 자극하게 되고 말았다. 실력과 인맥을 관리하는 일은 다르다는 걸 강조하고자 했던 내 주장이 마치 친구는 자기 친구가 인간성이 부족하다는 말로 오해를 했던 것 같다. 사회생활에 있어 실력보단 인간관계에 무게 중심을 훨씬 더 높게 놓고 싶은 절박한 마음이 무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난 왜 그렇게 사람의 됨됨이와 인간관계에 집착하며, 남들이 다 인정하는 괜찮고 쓸 만한 인간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고, 주변에 그런 사람을 찾고 또 갈망하는 이유도 있다. 물론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과 그의 인성(인격, 성품)이 늘 비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사람이란 타인을 어느 정도는 배려할 줄 안다.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지 않기에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혼자서 열심히 노력하면 쌓을 수 있는 실력보다 남과 함께 부딪히며 처절하게 배워가야 하는 사회생활이 진정 더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또 이 부분의 취약함이 사회에서는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대적인지, 물론 아무나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엄청난 노력과 깨짐과 밟힘과 고통과 인내가 없지 않으면 겸비하기 어려운 걸 알기에, 이 부분에 대한 나의 관심은 끊이지 않는 것 같다. 


특히나 일 좀 잘한다는 사람 중에 안하무인인 경우가 종종 발견되고,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잃어가며 자신의 업적을 쌓아 봤자 결국 아무도 그를 존경하거나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사회에서 뼈저리게 배웠다. 그래서 나 자신을 비롯해 내 자식에게도 실력도 좋지만, 인성이 기본 수준 이상은 되는 그래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를, 아니 한 인간이 되기를 정말 절절히 원하는 것이다. 


원만한 사회생활이란 절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만의 세상에 살면서, 난 그런 거 몰라하고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중심적 위험한 사고방식이 타인을 무시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남을 배려하지 못해 결국 사회에 훌륭하지 못한 못난 일원들만 자꾸 만들어 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이 필요한 건데, 경쟁 사회의 교육이란 게 온통 스펙 쌓기에만 매몰되어 있으니 갈수록 사회가 각박해지고 암울한 건 돌이키기 어려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많이 배웠다는 사람이나 여유가 있는 사람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마냥 쓰레기 같은 인성을 그대로 지닌 채 흘러가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모 대기업 가족들의 언어폭력은 물론 비행기를 떴다 내렸다 할 정도의 사내 갑질, 대권 주자로까지 물망에 올랐던 훌륭한 정치인이라 믿었던 사람이 위력을 이용해 부하직원에게 성폭력을 불사한 파렴치, 신뢰받는 언론인이 신뢰받지 못할 자가당착적인 언행으로 매일같이 TV에 나와 국민을 기만하는 모습, 노벨 문학상 근처까지 갔던 시인의 결코 아름답지 못한 성적 행동들과 자신의 죄를 부인하며 뒤틀린 양심이 쏟아낸 더러운 언어들, 금메달이면 전부라는 생각으로 폭행을 일삼은 체육계 코치들의 인권을 무시한 행동들, 아 어디 한국의 이야기뿐이랴? 내가 사는 미국도 일개의 대통령부터 시작해 거짓말과 거짓 뉴스가 판을 치는 이 혼탁한 세상은 정말 불과 최근의 일들만 나열해도 사람의 악취로 세상이 진동한다. 더 이상 인간들을 보는 일이 짜증 나는 세상이다. 


멀리 TV에만 있는 희한한 세상이 아니다. 내 주변도 더럽고 추악하긴 마찬가지. 학생들을 상대로 성추행을 일삼는 선생들이나 학생들에게 갑질 하는 교수에서부터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멋대로 횡포를 부리며 불통으로 일괄하는 위선적인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아랫사람에겐 홀대하고 윗사람에게만 아부하는 지극히 정치적 소양의 인간들은 내 주변에도 눈만 돌리면 수도 없이 많다. 날이 갈수록 깨닫게 되는 건 기득권자들이 더 못되고 더 악랄하며 더 정치적이며 더 비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간 자리가 사람을 더 비열하게 만드는 것인지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더티 플레이를 일상으로 알며, 인성을 팔고 자신의 이익에만 눈독을 들이며 태연하게 살아간다.     


주말 아침부터 인간성에 대한 주제를 놓고 너무 거침없이 내뱉는 건 아닌가 싶으면서, 또 나 자신은 얼마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가를 깊이 숙고해 본다. 잘못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니까 입이 괴롭지만 이런 논쟁을 멈추지는 말자. 혈기를 부릴 똑바로 박힌 정신이라도 있어야 그다음을 꿈꾸기라도 할 테니까. 나를 비롯해 우리 모두 괜찮은 인간이 되기는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웃기는 현상이지만, 나이가 중년을 넘어서면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하나 늘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 많아. 또는, 어쩜 세상에 괜찮은 인간이 이렇게 없지?”라는 말을 자주 하는 나 자신을 만난다. 믿었던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행태라던가 양심 없는 발언이나 행동과 사고, 이런 것들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예전보다 훨씬 잦아졌다. 특히나 나이가 지긋이 든 사람들에게서 이런 퇴행을 보면 ‘잘’ 늙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나잇살 먹은 사람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유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더 대조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특히 내가 일하는 대학이라는 교육의 전당에서도 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인간들이 정말 많다. 그래서 배우러 대학에 모두 모여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괜찮은, 아니 쓸만한, 아니 지극히 정상적인 , 아니 그저 평범한 생각을 하는 최소한의 인간도 찾기 어렵다. 정말 캠퍼스 빌딩에 한 두 명이나 있을까? 그래서 점점 살면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많이 하고 되어, 깊은 교제를 하기가 두려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아니면 인간의 본성이란 인간의 영원불변한 약점이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옛날에도 생활의 방식이나 사회적 관계가 다른 방식이었을 뿐 비이성적이면서 비인간적인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을 최근에 한 권 읽었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은 입이 닳도록 얘기하고 느끼면서도, 책을 통해 다시 대할 때마다 매번 놀라는 나 자신이 의아하긴 하다. 이제는 인간에 대해 포기하고도 남을 텐데 아직도 밑바닥을 다 보지 못한 생각이 들어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인지도. 


아서 밀러의 희곡 <시련, The Crucible>은 17세기 청교도 이념이 가득한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세일럼 지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세일럼 마녀재판을 소재로 한 책이다. 개인적 이익이 발단이 되어 사회적 이념과 결부해서 집단적 광기로 번져 나가게 만든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을의 목사든, 부지사든, 경찰 서장이든, 재판을 맡은 판사든 특히 마을의 지배층 인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며, 죄 없는 사람들을 마녀재판에 세워 처형해 나가는 어이없는 일들을 벌인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인간이 이렇게 악해질 수 있을까? 질투로 인해 음모를 만들고, 각자 자신이 살기 위해 위증을 밥 먹듯 하고, 각기 자신의 이득에 연루된 마을 사람들 하나하나가 마녀재판에 일조를 한다. 이 엄청난 연쇄적인 소용돌이를 깨고 빠져나갈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인간이 없어 이 어이없는 마녀재판은 계속해서 그 힘을 받아 이어진다. 


작가 밀러는 여기에 단 한 명의 인간을 마치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남겨 둔다. 그자도 불륜이라는 자신의 죄에서 결코 자유로운 자는 아니었지만, 그 대가를 지급하고서라도 사랑하는 아내를 음모로부터 구해 내려고 하고, 또 거짓 자백을 뿌리침으로써, 자신은 비록 처형대에서 사형을 당할지라도 양심을 속이지 않고, 한 조각 남은 자신 안의 선을 실행해 냄으로써,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 자신의 인간성을 스스로 되찾고 마을 사람들에겐 경종을 울리면서. 여기 남편의 떳떳한 죽음 앞에서 그의 아내가 던진 마지막 한 마디가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남편은 지금 자신의 선을 찾았습니다. 제가 그걸 그분에게서 빼앗는 것은 하느님께서 금하실 거예요!”


우리도 우리 안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조그만 선을 찾도록 노력해 보면 어떨까? 늘 양심이 꿈틀댈 때 나의 편리와 이득을 걷어내고 내 안의 선이 드러나도록 나를 다르게 사용해 보면?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양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내 안의 선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자. 작은 선 하나를 이루기 위해선 내 안의 작은 악 하나를 뿌리 뽑아야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선은 늘 내 희생을 먹고 자라는 것을 잊지 말면서. 하지만, 악을 이기고 선을 성취한 후에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 밀려올 것 또한 잊지 말자. 설교 같아 듣기 싫지만, 인성 공부가 어디 쉬운 일인가? 평생을 공부해도 이루기 힘든 일이라고 성현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매일같이 쉬지 않고 걸어 올라가야 하는 길뿐이니. 친구야, 미안하다. 어제 내 생각만으로 네 친구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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