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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Sep 26. 2019

Fun Home: A Family Tragicomic

Alison Bechdel

시애틀 공공도서관 'Banned books' 금서 코너에 있던 책이다. 만화책이 얼마나 불순하면 금서 목록에 끼었을까 궁금해서 집어 들었다. 글씨가 깨알같이 꽉 들어 찬 만화책은 바라던 바가 아니었지만, 가까스로 몇 페이지를 읽어본다. 꽉 찬 글자도 읽기 바쁜데, 대문자로만 쓰인 문장은 독해에 두 배의 시간이 걸린다. 왠지 모르겠는데, 나는 대문자로만 쓴 영어 문장을 읽을 때 단어 인식 능력이 급속도로 떨어진다. 아예 떠듬거린다. 예를 들면, 이렇다. 


Like many fathers, mine could occasionally be prevailed on for a spot of "airplane."


LIKE MANY FATHERS, MINE COULD OCCASIONALLY BE PREVAILED ON FOR A SPOT OF "AIRPLANE."


솔직히 어느 문장이 더 잘 읽히는가? 당연히 대소문자가 적절히 섞인 첫 번째 문장이다. 그뿐만 아니다. 만화책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여기에 나오는 영어 단어는 밥 한술 뜰 때마다 돌이 씹히듯 입안이 까칠해지며, 머릿속까지 까칠하게 만든다. 만화책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어휘들이 한 장이 멀다 하고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세상에 이런 단어도 있었던가? 알듯 말 듯, 형용사나 부사로 쓰이던 단어가 명사로 돌변해 이 단어가 그 단어였던지 머리를 긁적이게 한다. 물론 아예 까맣게 모르는 단어도 많다. 만화책이라고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고, 그래서 계속 손을 놓지 못하고 이어갔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단어를 대충대충 건너뛰고도 의미 전달이 가능했던 건 역시 만화책의 그림 덕분이다. 잘 읽히지 않는 글자체와 수려한 어휘에 버금가도록 이야기의 전개가 의뭉스럽게 펼쳐진다. 제목, <Fun Home 즐거운 집>에 속으면 안 된다. 여기서 Fun Home은 조부모가 경영하던 Funeral Home을 아버지가 물려받았기에 줄여서 표기한 말하자면, 장례식장을 뜻한다. 이 집에는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가 있다. 정원관리를 좋아하고 예술적 감각과 문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는 늘 자신만의 도서관에 빠져 산다. 부성의 이미지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아버지도 살짝 이상했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처음부터 헷갈렸다. 그림을 힌트 삼아 뚫어지게 살펴봐도 she와 he 사이에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화자의 이름은 작가 이름 그대로 여성형 Alison이고, 그림으로 표현된 화자는 완벽한 남자 아이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몇 챕터를 더 읽고 나서 이 책의 작가가 레즈비언이고, 이 만화책이 바로 그 주제를 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난 뒤였다.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작가 알리슨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작가의 아버지 또한 동성연애자 게이로서의 삶을 살았다. 남달랐던 아버지의 면모를 성장과정을 통해 서서히 알아가며 겪는 이야기라 하겠다. 아버지는 작가가 커밍아웃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43세의 나이에 트럭에 치여 죽게 된다. 미처 아버지와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보지도 못한 채. 그런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 시작된 작가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아버지가 그 연결고리가 되어 혼란과 부인 그리고 의심과 부정을 거친 뒤에야 답을 찾게 된다. 답이라기 보단, 자신과의 화해, 아버지와의 화해의 길을 찾는다. 자신이 레즈비언이 된 것과 아버지가 게이인 것이 우연일 수도 우연이 아닐 수도 있음을 작가는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론이 무엇이 되었든 작가와 아버지 간에는 돌이켜 보면 서로 다르긴 했지만, 같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성 정체성으로 인해 고민했던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서로 감지할 수 있었던 어떤 교감이 반드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작가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자신을 용납할 수 있게 된다. 


결코 가볍지 않은 가족 이야기, 그리고 성 정체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만화책이라는 조금은 가벼운 틀을 빌려 자연스럽게 서사하고 있지만, 절대 가볍게 읽을 수 없는 가족 내 두 부녀간 만에만 존재했던 기류를 엿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레즈비언으로 성장해 가는 한 인간의 삶의 과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재미도 있고, 지금보다 오래전에 게이로서 살아간 아버지가 커밍아웃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자신의 방에 갇혀 살았던 그만의 비밀스러운 행각 등을 쫓아가는 특별한 경험은 이성애자에겐 관음증적인 관심에 비할 수 있겠다.  


나보다 훨씬 더 젊은 작가라고 생각하며 책을 접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보다 살짝 더 나이가 많구나 하고 알아챘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호기심에 작가의 프로필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의 분이셨다. 존댓말을 써도 한참은 써야 하는. 작가의 유년시절과 커밍아웃을 한 70년대 후반을 생각해 보니 얼마나 더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치열했던 고뇌가 한층 더 깊게 다가온다. 그래도 이 작가가 소통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자신과 비슷한 삶을 먼저 경험했던 자신 이전에 있었던 작가들의 책을 통해서였고, 아버지 또한 책을 통해 홀로서기의 고독과 외로움을 그나마 달랠 수 있었다. 책은 역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가장 좋은 친구이다. 저들에게 친구가 되어준 책에게 고마움을 대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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