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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Jul 24. 2018

내가 원하는 엄마가 아닐지라도

<My Name is Lucy Barton>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학교에서 일하다가 잠시 휴식이 필요할 때 교내 서점을 들르곤 한다. 입구에는 항상 디스카운트 책을 매대에 놓고 판매하는데 나는 그 책들을 둘러보기 좋아한다. 이곳에서 가끔 괜찮은 책을 건지게 되는 건, 이들이 베스트셀러 위주로 진열을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탁월한 셀렉션 덕분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짧은 시간 내에 골라야 하는 부담감에, 굳이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는데 서점에서 돈을 주고 책을 구입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 작가의 영어로 된 책을 고르는 일이 가히 쉽다고는 할 수 없다. 책 제목과 표지와 목차에 의지해 그 날따라 이상하게 내 마음에 끌리는 책을 집어 드는 일이 내가 하는 선택하는 방법이라면 방법인데, 나는 무엇에 오늘 내 마음이 끌리는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흥미로워 기꺼이 책값을 지불한다. 그렇게 고른 책에서 잔잔한 만족감까지 얻게 되면 서점 매대에서 불필요한 돈을 썼지만 (도서관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돈 주고 책을 사기는 참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두둑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경험이 자꾸 나를 쉬는 시간에 교내 서점으로 향하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라는 책도 그렇게 만난 책이었다. 반질반질하고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서 책장을 넘기기도 부담스러운 고급 장정의 한국 소설책과는 다르게 미국 대중 소설은 흐물흐물하면서도 책장이 웬만해서 잘 구겨지지 않고, 책을 통째로 한 손에 꺾어 쥐어도 별 구김이 가지 않는 가벼운 종이 커버로 되어있다. 회색빛이 도는 허름한 종이에 적힌 활자들을 대하면 마음마저 편안하다. 책을 대하는 데 부담이 없다. 꾸미지 않고 진솔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종이 상태지만 좋은 글을 만나면 잘 몰랐던 사람에게서 향기 나는 성품을 운 좋게 발견하는 기분이 든다.  


소설마다 그 소설의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있다. 물론 읽는 독자의 관심사에 따라 그 힘의 종류가 각각 다르겠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이렇게 평범한 글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퓰리쳐상을 받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작가를 내 짧은 영어 실력과 문학의 조예로 논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너무도 평범한 문체와 이야기의 전개에 사실 좀 의아하긴 했다. 이렇게 쉬운 말로 쓰인 그래서 막힘없이 잘 읽히는 영어 소설은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냥 평범한 한 여자의 일기장을 담담히 읽어 내려가듯, 아주 수수한 옷차림의 여인을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듣듯, 그렇게 읽었다. 이런 소설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이 소설의 장점을 뭐라고 평하는지 궁금해할까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은 소설은 한 인간의 영혼이 지나온 작은 자취와 흔적을 글로 남길 수 있으면 전부라는 생각도 하게 해 주었다. 전 지구적 인류애를 대표할 필요도 모든 인간이 공감할 엄청난 이야기를 찾을 필요도 없다. 세상에 단 한 명뿐인 그 인간의 단 한 번 뿐의 삶,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단면의 인생을 잘 묘사해도 좋은 소설이 된다는 믿음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 가장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좋은 도구임을 다시금 신뢰하면서. 남들의 이야기에 짬을 내어 깊이 (적어도 한두 시간 이상) 잠자코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주변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와 기쁨을 외면할 사람들은 아닐 거라 굳게 상상해 보면서.  


이제 정말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나를 끌리게 했던 이 소설의 주제는 물론 ‘엄마’였다.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을 집어 들게 했는데, 사실 나보다는 친언니를 생각하며 골랐다. 언니와 엄마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소설은 여자 주인공 루시 바턴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와 나눈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야기 사이사이 과거 유년 시절과 가족들에 대한 회상, 또 현재 자신의 결혼 생활과 두 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루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가정에서 불우하게 자랐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녹록지 않은 우리 부모님 세대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그때는 모두가 어렵게 살아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면, 루시는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조차 눈초리를 받을 정도로 지독하게 가난한 생활을 했다. 아무리 70, 80년대라 하지만, 미국에서도 이렇게 어렵고 가난한 삶을 사는 가정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미 중부 지방의 한 시골 마을에서 그것도 남의 집 차고에서 루시의 다섯 가족은 추위와 싸워가며 생활해 나간다.  


2차대전 참전으로 독일군에 대한 전쟁 트라우마가 있던 아버지는 자녀들을 학대에 가깝게 거칠게 대했으며, 엄마 자신도 힘겹게 살았기 때문에 자녀를 사랑으로 돌볼 여유가 부족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트럭에 갇혀 하루 종일 지냈던 루시의 어두운 기억은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는 불신을 마음속 깊이 자리 잡게 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란 자신을 혼내지 않고 덤덤히 아버지가 자기가 먹다 만 사탕 조림을 한 사과를 불평 없이 먹는 장면에서 느낀 희미한 사랑이 전부이다. 게이인 루시의 오빠와 동생 루시에게는 전혀 관심 없는 언니도 막내 루시가 기댈 가정의 언덕이 되어주지 못했다. 루시는 하루빨리 이 가정을 탈출해 벗어나기만을 꿈꾸며 살았고, 결국 그 꿈을 이뤄 가족을 떠나 뉴욕의 한 도시에서 자신의 가정을 이루게 된다. 남편과 딸 둘에 얼핏 보면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이뤄 보인다. 하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루시의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않다.  


어느 날 루시가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염증이 생겨 계속해서 병원 신세를 오래 지내게 되자 루시의 남편은 루시의 어머니를 불러 루시의 병간호를 맡긴다. 그 과정속에서 두 모녀는 이제껏 나눠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병실에서 처음으로 친밀하게 나누게 되고, 그 속에서 루시는 유년 시절 자신에게 매우 부족한 엄마였지만, 자신의 병상을 떠나지 않는 현재의 엄마에게서 사랑을 천천히 회복해 낸다. 어린 시절 같이 살았던 주변 동네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엄마에게 전해 들으며, 엄마와의 유대감을 새로이 만들며, 유년 시절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이제껏 엄마와 한 번도 다정스럽게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루시의 내면이 새롭게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을 작가는 매우 차분하게 묘사해 그녀의 심정 깊은 곳까지 다가가게 도와준다.

  

루시의 엄마는 같은 동네 살았던 주변 인물들의 불행하고 충격적인 결혼 이야기를 루시에게 끊임없이 들려주는데, 두 모녀는 마치 남들의 불행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 삶에 한줄기 의미를 찾아보려는 몸짓처럼 이야기들에 집착한다.  


이런 잔잔한 이야기들과 때로는 충격적인 유년 시절 및 다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소설은 별다른 결론 없이 끝이 난다. 결론이라면 루시가 엄마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애정 결핍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일까? 그리고 엄마가 예측했듯이 어정쩡한 남편과의 결혼을 정리하고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었을까? 엄마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도, 자기가 사랑하는 딸에게 완벽하지 못한 이혼한 부모의 가정을 물려준 엄마로서 갖는 루시의 복잡한 감정을 소설은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이런 가정도 있어. 이렇게 엄마와 딸로, 가족 내에서 각자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보다는 상처를 안기며 살아가는 가정이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크게 한 개인의 삶을 지속해서 장악하고 갉아먹는지 증명해 주는 것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소설의 결말이었을까?  


한 개인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안전장치는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서 받는 기본적 사랑이라는 깨달음이다. 이 토대가 흔들리면 그 위에 어떤 멋진 집을 짓는다고 해도 곧 하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 빈틈을 인생의 중반에 만난 배우자가 채워주고 메꿔 주기도 하고, 자신이 낳은 자녀를 통해 채움을 받기도 하는 행운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루시의 경우처럼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쨌든 시작부터 사정없이 휘둘리고 흔들리게 되는 한 인간의 삶이란 누구에게든 원치 않는 고단한 여정임에 틀림이 없다.   


누군가의 엄마로 사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자녀 영혼의 평생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부담감을 소설은 일깨워 준다. 가정이 건강해야 하는 것은 물론, 엄마의 사랑이 지나치면 지나쳤지 부족하지 않게 느껴지도록 자식을 키워야 하는데, 나는 과연 잘 키운 걸까? 이 정도면 부족하지 않다고 줄 만큼 다 준 것인지 두 아이의 엄마인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무뚝뚝한 아들들이라 생각해 애정 표현을 미처 덜 한 건 아니었는지? 더 해야 했던 걸까? 아니면 이 정도가 적당한 걸까?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아직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결핍보다는 과잉이 낫다고 믿어보지만, 그것이 표현되고 상대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 아니까 하는 걱정을 떨치기 쉽지 않다. 그뿐만 아니다. 나의 엄마도 꼭 내가 바라는 모습의 엄마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떻게 엄마라는 인간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까? 엄마니까 이래야 한다는 생각, 엄마는 적어도 이렇게 행동하고 말해야 했지 않을까? 엄마가 왜 그래? 저런 엄마가 나를 낳은 엄마 맞을까? 우리는 저마다 이상형 엄마의 모습을 그려 놓고, 그런 엄마를 찾아 애타게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도 루시의 엄마가 루시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루시가 어렸을 때도 루시 엄마는 그녀를 분명 사랑했을 것이다. 왜 루시는 느끼지 못했을까? 아무리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하지만, 아무리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하지만,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고, 그렇게 가난해서 여유가 없었다고 하지만, 루시를 병간호하면서 발밑에서 한숨도 자지 않고 루시를 보살피는 엄마가 유년 시절 루시가 알았던 엄마와 전혀 다른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 나는 믿고 싶다.  


어떤 이는 아주 작은 사랑을 받고도 부족하지 않게 느끼고, 어떤 이는 세상없이 큰 사랑을 받고 자라도 부족하게 느낄 수 있다. 생긴 모습이 각기 다르듯이, 사람과 사람 간에 주고받는 사랑의 교환은 일정하게 측량할 길이 없다. 그렇게 생긴 사랑의 불충분이 모든 인간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10이라고 줬는데 너는 1로 받으면 우리의 셈은 절대로 같은 결과를 낼 수가 없다. 너의 셈과 나의 셈이 다르고, 너의 감정의 그릇과 나의 그릇의 크기는 애초부터 다르다. 그렇게 우리는 태어났다. 거기서 우리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면, 엄마를 용서할 수도 딸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다른 크기의 그릇을 들고 서 있음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루시의 엄마도 딸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닌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다 커서 비로소 루시가 알게 된 것처럼. 어쩌면 내가 들고 태어난 사랑이란 크기의 그릇도 어려서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크기로 성장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언젠가 이런 서로 간의 밀린 이해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아무리 긴 삶의 여정을 헤매다 만났다 해도 행복한 결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화해는 꼭 엄마와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 화해는 내가 나와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그런 결말을 이루고자 서로 간의 벌어진 틈을 메우는데 하루를 더 아껴야 하지 않나 싶다. 특히 엄마와 자녀 간에는. 적어도 사랑으로 맺어져야 할 천륜을 나눈 사람 간에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두 명의 엄마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나의 엄마와 엄마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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