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북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효경 Jul 18. 2018

너는 나의 '일'이라서 좋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김연수 소설가가 8월에 시애틀에 온다. 워싱턴대학교의 북소리 북 토크 프로그램에 초청 메일을 보내자 “시애틀은 가보진 못했지만 들어서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지 짐작이 간다며, 시애틀의 풍경을 소설에 잠깐 넣은 적도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게 어느 소설인가요?라고 바로 되묻고 싶었지만, 질문한다는 자체가 작가에게 결례가 될까 묻지 못하고 궁금해만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김연수 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덕분에 한 작가가 쓴 모든 소설 본문을 통째로 넣고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지극히 도서관 사서다운 생각을 갖는다. 책 전문이 검색 가능한 전자책 시대에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소설 속 키워드를 검색하는 게 과연 쓸모가 있는 검색 방법일까? 차라리 네이버에 시애틀을 소재로 한 김연수 작가의 소설이 무엇인가요?라고 네티즌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른 검색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시애틀이 들어간 김연수 작가의 소설 찾기는 바로 포기했고, 대신 북소리 강연의 책으로 선정한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8월 전에 읽어볼 계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소설 속에 시애틀 이야기가 나온다고 지인을 통해 전해 들었다. 이산가족을 만난 상봉의 기쁨에 비교할까? 8월에 작가를 만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말씀하셨던 시애틀의 풍경을 넣으셨다는 그 작품 아닙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근데, 정말 이 작품이 맞는 걸까? 읽으면서도 든 생각이지만, 다 읽고 나니 더욱더 미심쩍기만 하다. 작가는 분명 시애틀의 풍경을 넣은 소설이라고 말했었는데, 이 소설 속 시애틀은 그저 주인공 카밀라 양의 양아버지가 양 엄마와 사별하고 나서 젊은 여인과 사는 곳 정도로만 짧게 소개된다. 카밀라가 시애틀에서 산 적도 없고 (그녀는 에버렛에서 살았다), 그렇다고 비중 없는 양아버지와 새 애인이 시애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려서 잠깐 살았다는 태평양 연안의 도시가 작가가 묘사하는 시애틀이란 도시 전부였다. 조금 실망이다. 이번에 시애틀에 작가가 직접 다녀간 후에 시애틀 배경의 소설이 하나 탄생하지 않을까 앞으로 기대해 볼 일다. (지금 궁금해 검색해 보니 <스무 살>이라는 작품집 속 <사랑이여 영원하라>는 단편 속에도 시애틀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 이것도 읽어봐야 작가를 시애틀로 모시는 호스트의 기본이라고 하지 않을까? 어쩌면 작가를 만나게 될 8월이 되어도 찾고 있는 작품을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위 사연을 갖고 읽은 책이 바로 이 소설이다. 소설은 입양아 카밀라가 자신의 부모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 흔한 소재 같지만, 입양으로 인해 눈물 짜는 신파적 요소는 다행히 별로 없다. 대신 기분이 살짝 나빠지거나 등골이 서늘해지는 추리 소설적인 요소가 짙다. 몇 해 전 읽었던 작가의 장편, <꾿빠이 이상>도 추리소설같이 비밀을 찾는 이야기가 다분히 많았는데, 김연수 작가의 특징이라고 말해도 좋을는지 아직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소설을 읽으며 약간은 산만한 구성과 스토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작가의 특징일까?), 입양아 카밀라가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느라 고생을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한국인 독자의 의리로서 그녀의 탐색을 끝까지 응원했다.


17세 어린 나이에 카밀라를 미혼모로 낳고 바다로 자신을 던진 그녀는 과연 누구의 아이를 낳은 것인지? 아이를 미국으로 입양시킨 것도 슬픈 일인데, 그녀를 어린 나이에 낳은 엄마가 꽃다운 나이를 뒤로하고 자살로 일생을 마친다. 죽음은 이 가정에 검은 그림자처럼 짙게 깔렸다. 아버지 또한 자신이 일하던 조선소에서 고공 농성을 하다가 동료들이 화재에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죄책감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심지어 아이는 친오빠와 관계 속에 낳은 아이라는 소문마저 무성하다. 뭔가 선을 과도하게 넘어선 어두운 가족사나 성폭행 같은 듣기에 불편한 이야기가 하나 둘 펼쳐질까 봐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은 가슴을 졸이게 했다. 사고 속에 숨겨진 인간의 어두운 실체와 언젠가는 만나야 하는 불안함을 조성하면서.  


사실 어두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작가는 정말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이 소설에 총동원시킨다. 인물들은 온갖 미스터리 같은 단서들을 저마다 하나씩 던지며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한다. 도대체 카밀라의 아빠는 누구인지 독자의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진실을 소설에서 명백하게 밝혀주지 않는다. 독자가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미에 적어 둘 뿐. 하지만, 독자는 대부분 비슷한 결말을 상상할 것이라 예상한다. ‘희재’라는 이름 속에서. 그리고 둘이 같이 읽었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라는 시를 통해 나는 그 단서를 찾아본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고민하게 했던 등장인물들을 잠시 열거해 보자. 먼저, 카밀라의 엄마 정지은과 사제지간 이상의 관계를 나눈 것으로 보이는 최성식 선생이 등장한다. 온갖 루머를 뒤로 하고 최성식과 결혼하게 된 같은 학교의 신혜숙 선생은 처음부터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데, 그녀와 학생 정지은 간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도대체 카밀라의 아빠가 누구였는지 그 진실에 더욱 갈증 나게 한다. 남편의 결백을 의심한 최성식의 아내가 지은의 아이는 오빠와 낳은 딸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한다. 어린 소녀였던 지은의 학창 시절 친구였던 미옥은 그 소문에 일조하게 된다. 최성식 선생을 남몰래 좋아했던 미옥에게는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의 아버지로 인해 화재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픈 과거가 있었고, 그 때문에 지은과 최 선생 간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지은이의 과거를 겁 없이 왜곡시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인물들 모두 다 불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교사 최성식이 제일 그렇고, 남편의 결백을 평생 믿지 못했던 그의 아내 신혜숙도 불행하다. 아버지를 잃고 친구 지은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미옥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 같이 농성을 하던 동료들이 화재로 죽자 죄책감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지은의 아버지가 타워크레인에서 투신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불행하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혼자 아이를 낳고 어린 나이에 바다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지은의 불행이야 말할 것도 없다.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카밀라라는 이름으로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입양아로 살아가는 카밀라는 또 무슨 불행의 씨앗인가?    

 

이 인물들 외에도 작가는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진남의 도시에 불행한 인간들과 이야기를 더 심어 놓았다. 호주에서 왔다는 선교사 부부가 살던 집에서 어린 딸 앨리스가 사고로 죽게 된다. 폐가가 된 집에 진남 조선소 사장 가족이 들어오지만,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늘 밖으로만 돌던 남편 때문에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런 가정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라고, 엄마를 잃은 후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 사는 아버지를 보고 아들을 아버지를 증오한다. 아버지의 젊은 여자는 시름시름 폐병을 앓게 되는데, 그 집에서 죽은 앨리스의 유령 때문이다. 조선소에는 노동자의 파업이 이어지고, 공장의 화재와 투신자살로 인해 회사는 내리막길 운명을 맞게 된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던 불행한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조선소 사장 집에 매일 같이 돌을 던지던 또 다른 불행한 딸 지은이 마침내 이 비극의 집에서 서로의 심연을 울리는 만남을 갖는다.  


작가는 입양아 카밀라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등장인물들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이 아닐까 싶다. 이 인물들 간의 만남과 관계에서 동일하게 작가가 지적해보고자 한 것은 건널 수 없는 인간 간에 놓인 ‘심연’ 일 것이다. 가족이든 친구든 부부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누구나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 존재해 쉽게 다가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서로에게 쉽게 건너갈 수 없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을 건네려고 하는 그것을 위해 소설을 쓴 것”이라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제목이 매우 잘 지어진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이 말에서 심연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몸짓이 읽힌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고, 너는 나의 일이다.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이 곧 맞닿아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해 주는 제목이다. 누군가 한 사람은 나 외의 누군가를 생각해야 하는 게 ‘일’이라 좋다. 누구에게나 ‘일’이 있어서 희망적이다. 입양아 카밀라와 그녀를 버린 엄마 사이에도 파도가 바다의 일이듯 나의 ‘일’이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 주는 희망이라 생각한다. 가족 없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그래서 심연의 빠진 우리를 매우 희망적이게 한다. 이 소설의 키워드는 ‘짧게 네 번, 길게 세  번, 짧고 길고 길고 짧게, 짧게 한 번인 H.O.P.E.’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시애틀과는 무관한 소설이었지만 따뜻함을 남겨준 희망적인 소설이라 부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유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자유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