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료 <11분>
우연히 <11분>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분은 내가 아들과 나눈 전화 통화의 시간이었는데, 블로그의 글을 읽은 어느 독자분이 같은 제목의 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책에서의 11분은 남녀 간 성교의 평균 시간을 지칭한다. 작가의 유명세와 살짝 자극적인 제목으로 인해 영어 번역본을 찾아서까지 독서를 감행하는 열의를 냈다. 혹시 몰라 타 도서관에 한국어판을 주문해 두었는데 책이 영어판을 다 읽고 난 후에 도착하는 바람에 두 번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매우 노골적인 성애의 묘사가 과히 충격적이라 한국어로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의외로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삼류 잡지에 나올 법한 수위가 높은 언어들과 성에 대해 지나치게 직접적인 묘사 때문에 다시 읽게 되면 삼류 소설로 이 책이 전락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문학성을 논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책을 순수하게 문학만 생각하고 읽기에는 방해 요소가 많지 않았나 싶다. 내가 삼류 독자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주인공 창녀 마리아가 일기에 써 내려간 생각 중에 감동적인 구절들이 있어 메모해서 열심히 받아 적었다. 무엇보다도 창녀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으니까.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직업에 대해 갖은 자기 생각은 무엇인지, 그 속에서 주변을 관찰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과 섹스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나의 호기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잡고 놓치지 않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특히 그녀가 그토록 강렬하게 실행해 보려고 했던 유형의 사랑. 즉 타인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거나 욕망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논리. 바로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장 자유로움을 맛보는 것이라고 창녀 마리아는 주장했다. 이 책의 가장 큰 철학적 메시지라 할 수 있겠다. 공감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소유가 아닌 자유로움에서 오는 참된 기쁨. 하지만, 그런 고차원적인 사랑을 감내하고 추구할 수 있는 고차원의 인간들이 얼마나 될까? 참 회의적이긴 하다. 그리고 꼭 그런 차원으로 사랑을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사랑이란 한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 나누는 감정인데 그것이 어떠한 방식과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틀은 사랑이라는 날개를 달린 새를 작은 새장 속에 가두어 두는 꼴이 되지 않을까?
그녀가 추구했던 철학적 관념도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 그녀의 계획을 배반한다. 역시 사랑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를 구속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그를 떠나려고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끝까지 찾아와 동화 속 연인처럼 재회를 갖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여는 통속 이야기처럼 탑승을 준비하던 공항에서 이 둘은 로맨틱하게 재회하면서. 그 장면은 그녀를 물론 기쁘고 황홀하게 한 장면이었지만, 이제껏 그녀가 주장하고 실현해보고 싶어 했던 마음속의 모든 계획을 무참하게 배반한 꼴이 된 셈이기도 하다.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 그녀가 그토록 의도했던 삶에 대한 자기부정의 모습 같아 이 책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독자로서는 조금 실망이 되기도 했다. 뭔가 신데렐라가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되었다는 진부한 이야기로 흘러 버린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창녀가 돈 많고 잘생기도 멋진 화가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이런 우화 같은 이야기는 잘 나가던 소설이 갑자기 코미디로 전락하는 듯한 어설픈 엔딩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나치게 사랑의 구속을 피하려 했던 바로 그것이 어쩌면 마리아의 가장 큰 약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면서.
이 책을 모두 읽고 나면 마치 남녀 간 격렬하게 끌어 올랐던 성교의 시간이 끝나고 나서 찾아오는 허탈하고 허망한 느낌 비슷한 것이 적잖이 든다. 짧지만 강렬했던 11분의 세계는 마치 책을 흥미롭게 읽으며 온갖 유희를 다 누렸던 오르가슴에서 깨어난 것에 비교할 만할까? 11분처럼 짧게 느껴졌던 책이지만, 11분 후의 책을 다시 대하는 내 마음은 아주 다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이 창녀의 스토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지? 왜 사디즘적인 성은 그렇게 이야기의 흐름에 들어갔어야 하는 걸까? 그녀와 화가 남자가 서로에게서 발견한 내면의 ‘light’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몸의 교감보다 중요한 건 정신의 교감이라는 이야기일까?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그들도 그 누구보다도 황홀한 섹스를 나누며 더 가까워지는 걸 보면, 11분의 세계는 영혼처럼 중요하다는 메시지였을까? 남녀 간 사랑과 섹스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있는 관계는 아닌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최소한의 11분이 요구된다면 무리한 요구는 아니니까. 우스갯소리로 11시간이 아니고 11분이니까.
요새는 책을 읽고 나서 꼭 뭔가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한 권의 책에 의미를 꼭 부여할 의무는 없다. 그저 물 흐르듯이 책이 한 권 내 안을 들어갔다 다시 흘러나가면 된다. 그 짧은 사이에 마음을 깊숙히 또는 반드시 적셔야 할 이유는 없다. 책에 부담을 주지 말자. 나는 그저 한 권이 지나가는 통로이면 된다. 나이가 들면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를 확고하게 주장하는 인간으로 자라게 되는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유는 단순히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나쁜 것 같지는 않다. 타인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고 말하면, 이 책의 주인공 마리아가 아마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