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카엘> 아모스 오즈
극작가 아서 밀러는 이 책을 읽고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라고 말했다 한다. 무엇이 감동적이라는 것일까. 내 머리로 이해하기에 이 책의 러브스토리엔 남녀 간 균형이 상당히 일그러진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자와 그 여자의 모든 히스테리를 받아주는 착한 남자. 그 남자가 그 여자를 향해 참고 인내하는 이야기를 감동적인 사랑이라 표현한다면 아주 완벽히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히스테리를 영원히 감당할 착한 남자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힘든 것일까? 여자의 트집을 묵묵히 받아주던 남자도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는 외도의 길을 걷는 것으로 암시되며 끝난다.
소설은 이렇다 할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다. 여자 주인공 한나는 우연히 대학에서 미카엘을 만났다. 둘은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고 서둘러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소설은 이 젊은 부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과정 속의 사소한 이야기들로 전개해 간다. 한나의 신경질적이며 과민한 성격이 결혼 생활에 균열을 서서히 예고하면서. 이 여자의 투정이나 예민한 성격이 지겨워질 즈음 독자인 나도 그만 인제 그녀를 버리고 싶어진다. 현실 속 인물을 위해 참고 견뎌 줄 여유도 턱없이 부족한데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그 여유를 쓰고 싶지 않은 까닭일까.
사랑했던 남녀가 결혼해서 산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나와 미카엘 사이에는 그 이상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보였다. 지나치게 까탈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한나라는 여성 때문에 그녀를 지극히 참아주는 남편 미카엘은 천사처럼 위대해 보인다. 이 남자의 속은 과연 뭐로 만들어져 있는지 아내의 삐딱한 태도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자상하며 따뜻하다. 마치 중증 히스테리 환자와 결혼한 간병인처럼 아무런 대꾸도 반항도 불평도 없이 모든 걸 자기 일 인양 감내해 간다.
이 두 주인공을 관찰하며 남녀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내가 가진 정신세계를 어느 정도 타인의 것으로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그 핵심이 아닐까 싶다. 머릿속이 나만의 세계로 가득한 사람이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서둘러 시작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주인공 한나가 그렇게 보였다. 이 여자는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더 나았을 지 모르겠다. 결혼 전 혼자 살았을 때도 행복해 보이진 않았지만. 불행한 한 개인이 타인과 함께 사는 일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무척 고달프고 괴로운 일임을 확인하며 때로는 그것이 그 어떤 폭력보다도 더 과격한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착한 남편 같은 사람들이 그녀 주변에 더 많이 존재했다면 한나의 삶이 달라졌을까? 순순히 그녀의 히스테리와 정신적 짐을 잠자코 받아주는 사람의 숫자가 그녀에겐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해 보인다. 남편 외에 더 많은 사람이 그녀 주위에 포진해 있었다면 그녀가 행복한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사랑의 형평성에는 어긋나는 일이지만,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동등하게 나눠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좀 더 나눠 줘도 넉넉한 사람이 부족해서 찰랑거리는 사람의 그릇을 풍족히 채워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에 의미를 둘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적어도 그것을 깨닫고 그런 사랑에 감사할 줄 안다거나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는 그런 면에서 부족했던 것 같다. 무작정 부어주는 남편의 사랑을 고맙게 받지 못했던 그녀. 하긴, 사랑이 부족한 사람에겐 아무리 사랑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자신에게 있는 결핍이 무엇인지조차 이해 못 할 수 있으니까. 결핍이 말로 설명한다고 치유되는 것은 아니니까.
한나는 과연 어떤 여자였길래 왜 그녀에게 이런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 딱히 문제라고 할 수 없는 불안한 심리 상태와 특이한 기질을 갖고 태어났을까 궁금하다. 혹시 그녀의 조국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때문은 아니었을까 심하게 확장해 본다. 그녀의 성품이 이스라엘의 불안정한 상태와 잘 맞는 듯 해 보인다. 한 인간이 어디서 태어나 어떤 시기를 거치며 살았는지가 개개인의 성격과 사고를 형성하는데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는 숙지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한나의 혼란스럽고 안정적이지 못한 삶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1948년 이후 나라를 성립하고 그 뒤 아랍인들과의 전쟁을 통해 아직도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일치해 보이는 것은 나의 억지 해석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예루살렘에서 근래 들어 최대의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소식을 들었다. 아직도 그치지 않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을 보며 한나의 불안한 성격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해 본다.
책 덕분에 이스라엘이 지내온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가 남았다. 히브리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엄마,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쌍둥이들이 이제는 아랍인이 되어 한나를 꿈에서 계속 괴롭힌다. 황량한 예루살렘의 거리, 폭발물과 테러, 전쟁에 징집된 남편, 아랍인들과의 갈등 등등이 그녀의 정신세계를 흔들어 놓는다.
작가가 이 소설의 배경을 이스라엘이 독립국으로 자리 잡은 1948년 전후로 잡았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나의 미카엘>이란 제목처럼 어지러운 삶을 산 한 여인에게 사랑을 베푸는 남편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묘사해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의 지나친 상상력일지 모르겠지만,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여주인공 한나의 히스테리적인 심리상태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민족으로 사는 사람들의 깨지기 쉬운 분열적 정신 상태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을까? 미카엘의 이름이 천사의 이름이라는 것조차 단순하게 들리지 않는다. 미카엘 같은 천사의 보호와 헌신과 사랑이 이스라엘에 더더욱 필요하다는 역설? 선택받은 민족으로 누구보다도 더 많이 신의 은총과 사랑을 받았던 민족이 주변국과 치러야 하는 분쟁과 다툼으로 인해 이들을 히스테리적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한나를 보며 이스라엘을 깊이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스라엘을 향해 던지는 작가가 보내는 러브스토리가 될지 모르겠다.
끝으로 이 책의 저자 아모스 오즈는 남성인데 이 소설은 여자 주인공 한나의 시점으로 되어있다. 남성작가가 여자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쓴 소설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심기 불편했던 여자 주인공의 심리상태나 말투 및 그녀의 의식이 자꾸 작가와 오버랩되어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한나의 마음을 읽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한나를 그린 남성 작가의 의식까지 동시에 의식하려고 했던 나의 쓸데없는 불안 때문이었다. 어쩌면 남성의 눈으로 본 한나였기에 더 히스테리적이라고 내게는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여자를 이해하는 것과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는 것에는 상당한 갭이 존재 하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해진 한나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런 그녀를 천사처럼 잘 받아주고 오래 참으며 사랑하려고 애쓴 남편의 모습이 아주 애잔하게 마음에 남는다. 그가 한나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심지어 유대인이 한 사람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이란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이스라엘 작가의 첫 소설을 읽고 나니 이 나라 다른 작가의 다른 소설도 꼭 한 번 읽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이스라엘에 대한 문학적 편견이 이 소설과 함께 자리잡을 지 모르겠다. 괴벽한 여성에 비교해 엄마처럼 다정하고 세심한 남자의 이미지로 이스라엘의 여성과 남성이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될지 모르니까.
하나 더 사족을 달자면,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소설을 처음으로 대하게 될 외국인들을 거꾸로 상상해 봤다. 한국 전쟁이나 일제의 강점기 시대 내지는 광주학살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역대 대통령들의 참담한 정치 비리 같은 어두운 역사를 배경으로 한 우리나라의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에 대해 갖게 되는 이미지가 그렇게 밝지는 못하겠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을 하며, 역시 우리 개개인은 지역과 언어와 나라를 벗어나서 자유롭지 못함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