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북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효경 Apr 01. 2018

청년 아들이 연상되었던 책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읽기의 다양한 체험을 했다. 지나친 기대로 시작한 것에 비하면 다소 지루한 1장을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2장에 들어서 한 에피소드(학감에게 부당하게 매를 맞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부터 빨려 들기 시작해 드디어 발동이 붙는가 싶더니 3장에 가서는 완전히 책에 몰입될 수 있었다. 몰입이 불가능한 밤 비행기 안에서 읽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4장까지 정신없이 읽고는 마지막 5장을 남겨두고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다.  


그 후 한 장도 읽지 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을 집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한두 장 읽다 가도 급속도로 재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책의 내용이 무엇보다 혼란스러웠다. 주변 인물들도 오락가락, 워낙 오랜 시간 끌고 있던 책이었던 지라 자꾸 흐름이 깨지고 있었다. 몰입되었던 비행기 안으로 이 책을 들고 다시 들어가야만 읽을 수 있을 것처럼. 5장의 많은 페이지를 의미 없이 활자와 종이만을 확인하며 과감히 넘겼다. 그리고 책을 겨우 덮었는데, 리뷰는 금방 쓸 수 있을 것 같다. 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묘한 연상작용은 꼭 기록으로 남겨둬야 할 것만 같은 필연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읽기의 체험은 처음이었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얼굴이 지속해서 떠오르기는. 마치 그 누구의 이야기를 아니면 (그것도 미래의 이야기를 아니면 현재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미리 읽기라도 하는 듯한 묘한 느낌이었으니까.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질풍노도 청년의 시기를 격하게 보내고 있는 (내지는 있다고 생각하는) 내 아들이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목 때문이었을까? 사실 마음속 한구석에는 아들이 혹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언젠가는 그 길을 찾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마치 무슨 숨길 일처럼 은밀히 간직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종교에 대한 이유가 주된 이유였다. 최근 아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아들이 종교적인 회의를 품기 시작했으며 청년의 시기가 되어 이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찾아 나가야 하는 임무를 발견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한 부분은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이 자신의 종교에 대한 질문과 회의를 갖기 시작하는 부분에서였다.  


아일랜드라는 종교적인 국가의 지극히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예수회 학교에 다니며 착실하게 생활을 해 온 한 아이가 청년으로 성장해 가면서 자신만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지금의 내 아들이 겪고 있는 생의 과정과 비슷하다는 연상이 되었다. 물론 아들이 모태신앙에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또 대학을 가기 전까지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을 종교 생활을 무난하게 잘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최근 아들은 종교와 신앙과 믿음이라는 것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강하게 부정해 봄으로써 자아를 정립시켜 가려고 무단히 애쓰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한 인간이 성장함에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딛고 자신의 길을 찾아 걷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아들의 현재와 미래를 미리 읽기 하는 마음으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성장기 소설과도 같다고 한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자란 유년의 시절, 예수회 계열의 클롱고우스 학교에서의 생활, 어려웠던 가정의 이야기, 종교에 대한 생각, 성직자의 길이 아닌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을 진학하고 자신을 스스로 유배시키기까지 삶을 시도하며 실험하는 그 젊은 정신이 오롯이 담긴 소설이다.   


책을 읽는 일은 부산물을 얻는 것과 같다고 어느 지인이 얘기했는데, 이 소설 덕분에 청년 아들에 대해 적지 않은 위안을 삼게 되었다. 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청년의 때가 어떤 것인지, 나 자신도 물론 청년의 때를 거쳐 오지 않은 게 아니었지만, 아들을 둔 엄마로서 아들이 청년의 방황을 하고 있을 때는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엄마의 감정으로만 아들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 어리석은 행태를 마치 제임스 조이스 작가를 통해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고 할까.  


소설 속 주인공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 아들도 비슷한 고민과 번민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그 어떤 누가 되기 위해서라도 (사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디자인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모두 예술가이다) 이런 정신적 고뇌의 시간이 필요하며 자기 존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 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다시 인정하게 되었다. 아들이 지금 겪고 있을 여러 가지 고민들은 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를 더 우려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도 가져다준다.  


그리고 한 인간의 성장이란 정답 없는 길을 홀로 알아서 찾아 걷는 것과 같아서 가이드 없이 하는 모험과 탐험의 길이라는 것이다. 꽃 길과 활짝 열린 대로만이 삶에 유익한 길이 되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누구도 무엇이 가장 적합하고 좋은 길임을 알려줄 수 없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어쩌면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음을 인생의 중반쯤 걸어온 나도 겸허하게 다시 생각하게끔 해 주었다.  


젊은 예술가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걸어야 하는 성장기와 같은 소설을 읽고 나니, 아직 남은 후반 인생이라도 못다 한 삶의 발견을 계속해 나가야 할 동력을 받는다.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
매거진의 이전글 클론과 다를 바 없는 미투 피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