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유난히 공항에 일찍 도착한 지라 탑승 절차까지 넉넉한 시간이 남았다. 면세점을 둘러보는 일도 금세 지쳐 뭘 할까 망설이다가 책방에 들어섰다. 평소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귀국길 탑승 전에 책이 잘 읽히는 편이 아닌지라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날아온 친구의 카톡 메시지에 뜬 책 제안에 끌려 공항 책방에 나도 모르게 발길을 옮기게 되었고, 거기서 우연히 고른 책이 이 책이었다. 물론 전에 읽었던 작가의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좋은 기억이 선택에 한몫을 했다.
어떤 소설이든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하는 글은 읽는 이에게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켜 계속 읽고 싶은 중독성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도 캐시라는 간병인이 헤일셤에서 보냈던 기숙학교에 대한 이야기로 서술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분주하고 피곤했던 탑승 전 공항에서도 잘 읽히는 책이 되었다.
그러다가 문뜩 장기와 기증자라는 단어가 뜬금없이 나왔을 때 ‘아, 내가 무슨 책을 산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책 말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어야 했나 하는 후회를 아주 잠시 하기도 했었다.
내가 공상과학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그저 많이 읽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에서 온 낯섦때문에. 덧붙여 작가의 <남아 있는 나날>에서 받았던 지극히 영국적이었던 (이건 매우 주관적인) 인상 때문에 같은 작가가 공상 과학 소설을 썼다는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통해 마치 클론에 대한 지식적인 정보라도 주워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계속 읽게 된 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을 다 읽어보니 공상 과학 소설이라기보단 내게 익숙한 평범한 성장 소설에 더 가까운 책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깊은 맛이 여전히 느껴지는 소설이라는 데에는 한 점 의혹이 없다. 캐릭터들 간의 내면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가의 재주와 그 속에 담긴 작가만의 사색을 가져갈 수 있어 내 취향에 빗나가지 않은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의 유년기 헤일셤에서의 이야기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 클론의 특별한 삶을 얼른 엿보고 싶었던 내 호기심을 단박에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2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헤일셤을 졸업하고 주인공들이 각자 성인의 삶을 살았던 코티지에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클론에 대한 호기심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 기증자 클론과 간병인의 삶을 보여주는 최종 단계 3부에 가서도 뭔가 대단히 다른 클론들의 세계를 봤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까 싶다. 클론의 삶이나 일반인의 삶이나 목적만 달랐을 뿐, 하루하루 삶의 내면에 있어서는 한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갈등하고 고민하며 사랑하는 일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기 기증을 통해 태어났고 그것을 기증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비정한 목적만이 그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차이를 가져다줄 뿐이다. 물론 자신이 클론임을 온전히 인식하고 거기서 받게 되는 허탈감과 삶에 대한 공허감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저들의 꺼져가던 안타까움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내게 남은 것은 복제 인간을 만들어 장기 이식을 위해 소비하며 비인도적인 삶을 사는 미래 사회에 대한 환멸만이 가득하게 남았다. 아무리 인간이 생에 집착한다 해도, 클론의 장기를 빌려서라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다는 상상은 어쩌면 가까운 미래 안에 실제로 도래할지 모를 끔찍한 시대를 씁쓸히 맛보게 했다.
아마도 우리의 진짜 미래는 클론에 대해 갖게 될 비인간적인 감정조차 잘 포장해서 가장할지 모른다. 영악한 인간들이 모두가 비난받을 방법으로 클론을 양육하지는 않을 것 같다. 좀 덜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좀 덜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온갖 수단을 강구해서 기필코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더 교묘하게 더 교활하게 발전해 갈 인간의 과한 욕망을 생각하니 우리의 인간성은 어디서부터 회복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어찌 보면 장기 이식은 결국 인간의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인간을 위해 또 다른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은 무엇으로도 변명하거나 용납할 수 없다. 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한 장의 복사물처럼 인간의 생명을 더 경시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만 쌓인다. 인간을 하나의 장기 또는 부속품처럼 취급하는 세상이 도래해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가치는 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정말로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미래 사회 클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지금 바로 오늘에도 비일비재한 인간이 인간을 학대하는 이야기라고 본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대할 때 (특히 갑과 을의 관계에 있는 인간 간에) 인간을 도구화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인간을 소비하는 것에 초점을 다시 맞춰본다.
요새 미투 (#ME TOO)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한창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하룻밤만 자고 나면, 새로운 범죄자가 생겨나는 형국이다. 신망하고 신뢰했던 인물들이 하나 같이 성폭력의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어제는 예술인, 오늘은 정치인, 내일은 문학인, 모레는 누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자신이 가진 권력과 위치를 이용해 타인의 고귀해야 할 성을 유린하고 강간하는 범죄를 버젓이 저질렀다. 나의 유익을 위해 클론의 장기를 이식받고 클론의 생명을 짓밟고 살아가는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성적 폭력이든 다른 방식이든 학대하고 억압하는 것이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난무하고 있지만,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고 앞으로도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고 작가는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요새와 같이 성폭력에 미투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이어지는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소설을 그렇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나보다 지위가 낮아도 아무리 나보다 못 배우고 못 난자라 해도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존중받고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할 인권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된다.
자신이 누릴 잠시 잠깐의 유희를 위해 타인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을 탈취하는 것, 그것은 엄연한 인권 유린이고 범죄이다. 인간이 누릴 수 없는 것을 이제까지 얼마나 죗값 없이 맘대로 누려왔던가? 이제는 그런 사악한 쾌락은 버리도록 하자. 나도 기쁘고 너도 함께 기쁠 수 있는 것에서만 진정한 기쁨을 찾자. 너의 상처를 담보해서 내가 기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부터 잘못된 것이다. 타인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나의 기쁨의 재료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그건 약탈이고 노략질이다.
타인의 기본 인권을 지키기 힘든 사람이라면, 심심하지만 덜 재미있겠지만 차라리 혼자 놀아야 한다. 힘들겠지만 그저 하늘을 보고 자연을 즐기며 길을 걸으며 (좀 더 고상하게는 책을 읽으며), 주위의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되는 재미로 즐거움을 채워야 한다.
인권은 저 멀리 높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강단에 올라가서 인권을 목소리 높여 주장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니까. 의외로 아주 가까이 있다. 오늘 내 주변의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했는지 돌이켜 보자. 내 가족, 내 일터에서의 동료, 나와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주변의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 과연 인간적으로 대했는가? 묻고 또 묻자.
미투 운동은 앞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되는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지구 상에 마지막 미투의 희생자가 빼앗겼던 인권을 모두 찾아내는 그 날까지 말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 땅에서 그렇게 잊힌 채로 떠나보내서는 안 된다. 작가 이시구로의 클론들은 이렇게 호소한다.
Never Let Me Go. 나를 보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