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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Feb 04. 2018

화가와 작가는 떠난다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내 직업이 도서관 사서라서 그럴까? 귀에 익은 책 제목이 왜 그리 많은 지. 누가 무슨 책 제목을 이야기하면, 나의 반응은 응, 그래 그 책 들어봤지. 딱 그렇게 들어만 본 책이 부지기수로 많다. 직업상 평생 갖고 가야 할 괴로움이 아닐까 싶다. 딸랑 제목만 아는 책을 대하는 일이란 자신에 대한 불신 내지는 자괴감 아니면 채무자와 같은 부채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달과 6펜스>도 귀에는 살갑게 감겨왔지만 머릿속은 한없이 무안했던 제목이다. 원제는 The moon and sixpence. 유독 영국 작가들이 책 제목에 돈의 단위를 쓰는 경우가 많은가? 세계문학전집 300권 중에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가 있었는데 이번엔 6펜스다. 하지만 이 소설에 돈을 시사하는 내용이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책 내용과 무관한 제목이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작가 서머싯 몸의 다른 책 <인간의 굴레에서>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이라 한다. 책 속 주인공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달을 바라보느라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발 밑에 떨어진 6펜스는 보지 못했다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작가가 왜 하필 이 책에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을 달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름다워 늘 바라보며 갈망하는 존재이긴 하나 가까이 갈 수 없는 ‘달’. 고개만 숙이면 금방이라도 주울 수 있는 발 밑의 결코 크지 않은 돈 ‘6펜스’ (참고로 영국의 화폐 단위 1파운드가 100펜스의 개념이란다). 둘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굳이 소설의 내용을 제목에 짜 맞추는 일이 어리석은 짓이긴 하나 시도해 보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소설의 모티브였던 화가 고갱의 예술적인 삶이 마치 '달'과 '6펜스' 같다. 자신의 발 밑에 놓였던 현실을 과감히 버리고 또 그렇게 현실을 떠나는 것 자체를 개의치 않은 채 거대한 달덩이 같은 예술의 실현만 위해 끊임없이 달바라기 하는 것에 비유해 본다. 맞습니까? 서머싯 몸 작가님?


소설 속 극 중 작가로 내레이션을 맡은 인물이 주인공 화가의 삶을 회상하며 담담하게 <달과 6펜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증권거래인의 직업은 물론 아내와 자녀를 가진 단란한 가정을 한 순간에 버리고 화가의 길을 찾아 떠난 주인공. 런던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타히티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찾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안락함과 평안함도 떨쳐 버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던 주인공 예술가의 삶은 평범한 독자에게는 자신의 미적 추구를 위해 타인의 삶을 파기한 듯한 불쾌하고 기괴한 느낌마저 가져다주는 게 사실이다. 떠나온 아내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나 미안한 기색은 전혀 찾아보기 힘들고, 자신의 그림을 위해서라면 아내 외의 여자 (그것도 다른 남자의 여인)과 새 살림을 마다하지 않고 (물론 여성이 자원한 것이긴 하나), 좀 더 원시적이고 좀 더 원초적인 곳을 향해 태평양 한가운데로 떠나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타히티의 원주민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며 또다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오직 자신의 그림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예술혼과 처절히 싸운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래서 예술가의 삶이 평범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이 주인공은 예술가로서 무척 행운아 중의 행운아이다. 늦게나마 당대에 이미 화가로서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는 있지만, 하루하루 고뇌에 차 있을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화가들을 생각해 보라. 특히 고갱과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평생 그림 한 장 판 것이 전부였던 불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가장 대표적이지 않을까.


고갱의 이야기고, 화가의 이야기고, 그런 화가에 대해 글 쓰는 작가가 서술하는 이야기라서 이 소설을 꽤나 흥미롭게 읽었다. 고갱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쓴 소설이라기에 더더욱 그랬다. 나는 소설 속 내레이터의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는데, 내가 고흐를 생각하며 소설을 썼던 것과 작가가 고갱을 생각하며 소설을 쓰는 것을 감히 비교하며 읽어 나갔다. 마치 우리는 한 세트로 묶여 있는 느낌을 받으며. 꼭 만났어야 할 작가를 만났다는 느낌으로. 서머싯 몸은 이렇게 소설을 썼구나 하는 작가적 영감도 받으면서 말이다. 


소설은 나 안에서 서서히 잊히고 있던 고흐를 다시 생각나게 했다. 고흐를 읽던 과거의 내가 내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는 희열을 느끼게도 했다. 고흐에 영감을 받아 소설이라는 걸 난생처음 써 볼 수 있었던 추억으로 기분 좋게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이 소설의 내레이터도 고갱의 발자취를 찾아 타히티 섬으로 떠난다. 고흐를 찾아 아를로 떠났던 내 삶의 짧지만 격렬했던 그 한 순간이 내 인생의 페이지에서 파르르 다시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페이지들은 내 인생의 책에 가장 화려하게 기억되는 부분이라고 할까? 마치 추억 속 즐거웠던 한 때의 사진을 보며 (아님 지금보다 훨씬 날씬하고 싱그러웠던 내 지나간 과거의 사진을 보며) 이게 정말 나 맞아? 내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 하며 스스로 감탄하는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자꾸 들춰보고 싶은 그리운 추억의 앨범이다. 아를에서 보냈던 비록 짧지만 예술을 향한 그리고 고흐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 주고 바로 그것이 힘이 되어 오늘과 내일을 살게 해 주고 있으니까.


이 책이 잊혔던 앨범을 뒤지듯 그 페이지로 나를 몰고 간 고마운 은인이 되었다. 그리고선 잊고 있던 내일의 꿈까지 다시 시작하게 해 주었으니 고맙고도 친절한 은인인 셈이다. 마치 아를로 떠나기 전에 내 가슴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남프랑스의 태양 아래에서 바싹 달궈졌던 것처럼, 지금 이 책은 나를 또 다른 도시를 향해 등을 떠밀고 있다. 나는 떠밀림에 감격해 또다시 파르르 떨며. 


생의 마지막에 고흐가 머물렀던 그곳, 동생 테오와 같이 영면해 있는 그곳. 이번엔 어떤 글이 나올 수 있을지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창작과 예술을 향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가슴은 이미 뛰기 시작했고, 이제 나는 뛰는 심장을 들고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치 내가 타히티로 떠난 고갱을 이해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흉내 내 본다. 마치 내가 서머싯 몸 작가라도 된 양 대단한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맘껏 취해 본다. 그것이 창작과 예술의 시작이고 에너지가 아닌가 싶다. 뭔가를 위해 노력해 보고 싶다는 에너지. 그 영감의 에너지를 받았을 때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질하는 내 모습을 사랑한다. 일상이 예술에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허영이라도 부려서 찾아내고 싶은 내 안에 숨은 값진 욕망. 이 모든 것을 이 책을 통해 내 가슴 깊이 빨아들인다. 


고마운 책이다. 책이 아니고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 책은 늘 이렇게 귀한 것들을 값도 없이 마구 선사한다.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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