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 책을 어렵게 어렵게 읽었다. 먼저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불과 2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인데 길고 길게만 느껴졌다. 수용소의 하루를 엿보는 재미가 생각보다 덜했다. 그만 읽을까 하는 유혹도 없지 않았는데 책을 덮자니 수용소의 죄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쉽게 그만둘 수도 없었다. 소설의 전 내용이 수용소의 하루를 꼬박 담았는데 일 년을 수용소에 갇힌 느낌을 받았다면 내가 소설에 완전 동화되었다고 말해야 할까?
수용소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질렸다. 강제수용소 막사나 작업장의 한기가 그대로 내게 전해져 손과 발이 얼어붙는 듯했으니까. 겨우 200그램짜리 빵 한쪽을 먹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끼니와의 생존 투쟁이 내 배가 허기지듯 고통스럽게 했고, 작업장에서의 고된 일과에 지쳐 몸이 파김치가 되는 느낌은 무거웠으며, 따가운 감시와 통제 속에서 어떻게 하면 눈치껏 지긋지긋한 수용소에서의 긴 하루를 잘 마감해야 하는지 내 일과인 양 힘들게 다가왔다. 그래서 빨리 이 책을 읽어 치우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고달프고 긴 하루를 어서 빨리 끝장내기 원하는 마음으로. 그래 봐야 다음 날 똑같이 새벽 5시에 기상을 해야 하는 잠시 만의 위안이지만.
수용소의 하루가 과연 언제 끝이 날지 지겨운 마음에 맨 끝 페이지를 살짝 훔쳐보기도 했다. 중도 포기하면 했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마지막 페이지부터 먼저 본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 정도로 난 수용소에서의 복역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근데 끝을 보고 나서야 이 책을 읽어 낼 힘이 생겼다면 역설일까? 놀랍게도 마지막 페이지는 주인공이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드는 것을 묘사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고 분명히 적혀 있었는데, 그의 행복은 간소했다. 점심때 죽 한 그릇을 더 먹을 수 있었고,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오늘 하루 작업량이 많지 않았다. 우연히 주운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으며, 잎담배도 샀고, 저녁에는 다른 수용자의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도 했다. 그리고 아침에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이 행복한 결말을 먼저 읽고 나니 눈앞이 캄캄한 수용소의 하루를 읽을 자신이 비로소 생긴다. 그렇지. 인생이 그런 거지. 소소한 기쁨을 찾으며 고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것이지 하는 공감이 급속도로 생기는 것을 체감하면서. 마치 고된 하루 끝에 오늘 밤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조그만 침대만 있어도 좋겠다는 작은 기쁨이 세상 그 어떤 행복보다 더 큰 것으로 다가오면서 말이다.
이 소설은 1963년 출간 당시 최초로 소련 강제수용소의 실체와 그 현실을 그대로 폭로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작품이었다고 한다. 부조리하게 강제 수용된 사람들과 그들의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열악하며 비인간적이었는지 그 면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책이긴 하다. 부조리한 소련 체제의 민낯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용소의 하루 속에서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고통도 행복 속에서 어쩌다 한 번씩 찾아와야 그 아픔이 처절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이 매일매일이 고통으로 반복되는 삶에서는 웬만한 고통이야 잘 눈에 띄지도 못한다. 작은 고통은 쉽게 무뎌지고 사라지기까지 한다. 그런 상태에서 찾아온 행복? 어쩌다 찾아온 행복은 고통으로 점철된 곳에 나타난 것이기에 귀중하다. 그렇게 행복은 어쩌다 한 번씩 엄청난 크기로 고통 속으로도 찾아온다. 까만 바탕에 아무리 작은 하얀 점이라도 금방 눈에 띄듯이 말이다. 어쩌다 먹을 수 있었던 죽 한 그릇이 수용소 생활에 큰 기쁨을 가져다주듯이 말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시소오를 타고 있다는 생각. 시소오의 양 끝에는 행복과 불행이 각기 앉아 있다. 불행과 행복은 불과 조금의 무게 차이로 인해 올라가고 내려간다. 불행과 행복은 서로 멀리 있는 것 같지만, 매우 작은 것 하나가 그사이를 오가게 하는 게 아닐까? 51%와 49%의 차이처럼 한 끗 차이가 나를 행복의 저편에 때로는 불행의 이편으로 옮겨 놓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2%의 그 차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아주 작고 사소한 것 하나만 찾아도 우리는 금세 행복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다면 말이다.
작고 미미한 2%의 소소한 행복을 찾을 힘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수용소에 있던 모든 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처럼 소소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그는 남들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 것을 행복하다고 여기고 그 행복을 만끽했다.
행복은 어떤 이에겐 자주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겐 평생 만나기 힘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차피 작은 것이라서 애써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찾아지지 않고, 워낙 소소한 것이라 행복이라 애써 생각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기에. 그래서 누구는 평생 행복할 수 없고, 누구는 수용소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 간다.
행복이란 사실 그렇게 사소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찾으려 들면 도처에 널린 것.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으며 오늘 하루를 행복으로 맘껏 채워 보면 어떨까 싶다.
오메, 행복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