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9주년
무심코 본 달력에 빨간 별 표시. 결혼 9주년이었다.
벌.써. 9주년이라니.
아내와 처음 만난 것은 소개팅이나 미팅 자리가 아닌 면접에서다.
아내는 인턴 지원자였고 난... 그렇다.
예상대로 인턴 면접관이었다.
다대다 면접이었고 아내와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결과는 둘 다 통과.
아내는 그렇게 안랩(구 안철수연구소) 분석팀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아내의 첫인상은 귀엽고 이쁜 이미지였지만
나에겐 그저 다른 인턴들처럼 '대학생'일뿐이었다.
대학교 1학년 남학생이 초등학생 5학년 여학생을 보는 느낌이랄까?(실제 나이 차이도 그랬다).
당시 난 무척 바빴고 마라톤에 미쳐있었고 휴가시즌이 오면 2주간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아내가 3개월 인턴 생활이 지났을 무렵,
그러니까 햇병아리 같기도 하고
이제 갓 눈을 뜬 새끼 강아지 같은 아내가 초등학생 5학년이 아닌,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냥 대학생 여자 사람으로 보였던 저 인턴이 왜 여자로 보이지? 당황스럽게?!
처음엔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나?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봤지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날부터 태산 같은 기세로 아내를 몰아쳤다.
하루가 멀다 하고 홍대로 불러내 불닭을 먹고
감자탕을 먹고 새벽까지 술을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리고 늦가을 어느 날,
꽃내음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 아내에게 건네주며 오늘부터 1일!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돌이켜봐도 그때 아내는 참 귀여웠다(물론 지금도... 하마터면 늦을 뻔!).
이후 회사에서 둘 만의 비밀연애가 시작됐다.
난 출근하면 아내를 모른 척했고 아내 또한 나를 모른 척했다.
한 번은 출근할 때 아내 자리에 조심스럽게 두유를 놓고 가는데 옆 자리 남자 인턴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놀란 눈은 안경 너머로 2배 이상 커졌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은 표정과 함께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가 떨리듯 천천히 고개를 돌릴 때 내 귓가에서 뚝! 뚝! 뚝!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모니터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은 영혼 없는 껍데기 같았다.
시간은 하루하루 열심히 달렸고 아내 인턴 종료일 3일 전,
난 팀에 아내와 사귄다고 중대발표(?)를 했다.
공개가 되자마자 동료들은
감쪽같았다, 완전 도둑놈이네, 인턴을 뽑으라고 했더니 아내를 뽑았네,
8살 차이 능력자네, 어린 사람 상처 주지 말고 진지하게 사귀어라, 결혼까지 해라. 등 많은 조언이 빗발쳤다.
으. 저 오지랖들. 그냥 부럽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평소 아내에게 장난이 심했던 남자 인턴은 내 연애 소식을 듣자마자
나에게 달려와 90도로 인사를 하더니 오해라고
자신은 아내를 괴롭힌 적 없었다고 자진 신고를 하는 바람에 정신없이 웃기도 했다.
우린 틈만 나면 산으로, 바다로, 국내, 국외로 여행을 다녔다.
첫 해외 여행지는 좀 특이하게 네팔-안나프루나였는데
난 그 2주 간의 여행을 갔다 온 후에 아내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인생이 이렇게 만만할리 없다.
인생은 뒤통수가 제맛이고
사랑은 시련을 좋아하고 드라마를 원한다.
우리에게도 장인, 장모의 결혼반대라는 시련이 있었다.
몇 살이라고?
34살입니다.
(깜짝 놀란 얼굴로) 몇 살이라고?
34살입니다.
여기, 소주 2병이요!
내 나이를 물은 장모님은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랬고
장인어른은 내 나이를 듣자마자 소주 1병도 아니고 한 번에 소주 2병을 시켰다.
자네는 뭘 하는가?
안랩 다니는 엔지니어입니다.
집은?
신길동에서 전세 2600만원에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살아계시고?
아버지는 6살 때 사고로 돌아가셨고 지금은 어머니만 살아계십니다.
이후 장인어른과 난 말없이 소주잔을 비워냈고
얼마 후 아내 가족들과 어색하게 식당에서 나왔다.
미안하지만 차에 자리가 없으니 알아서 가게.
네에. 알겠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운 딸자식을 가진 아버지 눈에는
그저 홀어머니 손에서 큰, 변변한 집 한 채 없는,
연봉도 그저 그런 회사를 다니는 엔지니어일 뿐이었구나!
내 인생을 몇 개의 숫자로 판단하는 것이 좀 억울했지만
그게 딸 가진 아버지가 보는 시각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만약 저 차에서 여자 친구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대로 주욱! 각자 갈길 가는 거다.
내가 아무리 여자 친구를 좋아하지만
내 인생을 매번 부끄럽게 생각하며 사귀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내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내 앞에서 부웅~ 소리를 내며 출발했던 차는 얼마 가다가 멈췄고
그곳에서 여자 친구가 내렸다.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요. 당신만 내 옆에 있다면.
연애 5년 만에 우린 가족, 친적, 지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다.
그리고 세계여행을 했고 3년 전에 한국에 돌아와
각자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결혼 9주년이 됐다.
연애기간 포함해 총 14년 동안 함께 지내오면서 우린 서로 물들어가고 스며들었다.
아내의 뚱한 표정에 내 웃는 모습이 스며들었고
나의 근거 없는 긍정에 아내의 냉철함이 스며들었다.
웃는 모습이 닮아갔고 식성이 비슷해졌다.
결혼 10주년에도,
결혼 20주년에도,
결혼 30주년에도,
지금처럼 기쁜 일에는 함께 웃고 힘든 날엔 서로를 위로해주며 즐겁게 살아보아요~
mi am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