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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Sep 05. 2021

영화는 나를 넘어선다

얼마 전에 단편영화를 찍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연출한 배경에는 사실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나는 한때 창작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대단한 예술혼을 타고난 것은 아니고, 어쭙잖은 예능 기질로 창작의 길에 입문하게 된 다소 불행한 경우다. 예술혼이 진득한 경우라면 대중의 각광을 받기라도 했을 터인데 그러지도 못하고, 나름의 끼는 있어서 보통의 예술가들이 겪는 고충은 또 따라서 치르니, 얼마나 성가신 삶인지 모른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겐 대개 속병이 있다. 주기적으로 창작욕을 풀어주지 않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태열 같은 것이 솟구치는 속앓이를 한다. 나는 이런 현상을 무병에 비견하곤 하는데, 나의 무병은 2년을 주기로 착실히도 찾아오곤 했다. 얼마 전이 딱 그 주기였다.


오랜 시간을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에 매진하고, 학문의 길에 놓인 부수적인 일들을 수행하다 보니, 내가 창작을 했던 사람이란 사실은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머리에서 조차 창작이 사라져 버렸기에 이번엔 조용히 지나가나 싶었는데, 눈치 없는 몸뚱이가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삐죽거렸다. 얼굴은 파리해지고, 명치끝이 답답한 게, 더 이상 몸에서 윤이 나지 않았다. 하루빨리 날을 잡았어야 했고, 살풀이를 하듯이 영화를 찍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의 영화는 의도가 불순하게 시작됐다.


그러나 계획은 진즉에, 꽤 치밀한 준비를 끝마쳤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오 년 간 하드웨어에서 잠자고 있다가 나의 부름으로 세상 밖엘 나왔다. 제작의 키를 쥔 투자자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영화가 수필 같다는 칭찬 같은 욕을 듣고는 시나리오를 다시 단장했다. 오랜 친구이자 뮤즈인 여배우 누나에게 공수표를 날리며 캐스팅을 못 박았고, 내 연출 인생을 함께한 촬감 후배와 평소 따라주었던 조연출 동생을 스텝으로 구성했다.


나는 헤어진 여자 친구의 집을 다시 찾는 심정으로 대학로를 거닐며 장소 헌팅을 했다. 예전에 공연을 했던 공연장의 실장님을 만나, 무료에 가까운 대관을 계약했다. 이처럼 영화 제작의 과정엔 대단히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이 험난한 과정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무모하게 몸을 부딪혀야만 한다.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순간들이었다. 나의 배우들은 시나리오를 거닐며, 내가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인물들을 현실에 불러내 왔다. 절친한 배우이자 감독인 누나는 자신의 오랜 경험으로 나의 힘듦을 직감하고는 사서 슬레이트를 잡고 현장을 정리했다. 나의 분장사 친구 덕분으로 영화 속 미술은 다채로워졌고, 나의 그냥 친구들은 1초짜리 인터컷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며 영화의 볼거리를 풍성하게 했다.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재능과 시간이 필요한지 모른다.


삼일 간 촬영장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우리가 벌였던 일들은 어떤 말로 설명이 가능할까? 실체라고는 나의 말과 열 장 남짓한 대본과 스토리보드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 같은 곳을 향하여 움직였다. 이는 단순한 친분이나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가능한 짓이 아니었다. 형언할 수 없는 그 어떤 기운이 그날에 우리를 인도했으리라.


나는 촬영을 하며 나의 영화가 나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액션과 컷을 외치던 사이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영감과 의견이 개입되어, 나의 상상을 가뿐히 넘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보일 수 있는 책임감이 영화를 더 완전하게 키우고 있었다. 우리의 직무는 그 어떤 예술가의 행위보다 아름다웠다. 나는 그날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분장>은 이렇게 많은 예술가들의 정성과 노고로 탄생했다. 내가 더 이상 나의 영화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다. 며칠 전 우리의 영화가 <예천 국제스마트폰 영화제>에 본선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의 영화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나, 본연의 힘으로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고 있다. 나의 소임은 여기까지다. 앞으로의 영예와 성취는 온전히 영화만의 몫이다. 영화는 나를 넘어섰고, 내 앞에는 또 과분한 일들이 놓여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영화가 나아가는 길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밖에 없다. 더 힘차게,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기를. 그저 이 글이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신: 영화 <분장>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 9월 8일까지 관람이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재밌게 관람해주시고 따뜻하게 성원해주시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450) 제3회 예천국제스마트폰영화제 본선작 [일반부] 분장 / 이종현 / 일반부영화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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