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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몬드 Mar 08. 2022

[ep3] 그가 화가 난 건 을이 을 답지 못해서다

오지게 재수없는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갑자기 사무실에 들이닥쳐 정당한 이유없이 사무실 직원들 앞에서 모멸적인 언사를 행했다. 내가 잠깐 꿈이라도 꿨던 걸까. 사무실은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잠깐 미친 놈이 사무실에 왔다가 간 것으로 상황은 정리됐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 신경쓰지말라는 R 팀장의 이상한 격려와, 고생이 많다며 팀장이 건넨 과자에는 '조용히 넘어가자'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원래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 '원래 자주 이런 일을 벌이는 사람'. A는 그렇게 통했다. 직위를 막론하고 마음에 안드는 행정에 즉시 반기를 들고 고압적으로 위력을 행사했다. 특히 힘 없는 여자 직원은 그에게 만만한 타겟이었는데, R팀장도 피해자 중 한 명 이었다.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는 힘 없는 여자 직원에게 폭언을 행사하는 인간 말종이었지만 이 조직에서 한번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A는 이미 R 팀장의 사무실을 찾아가 한바탕하고는 울분을 삭히지 못해 이어 여기저기 고성을 지르며 돌아다니면서 '홈페이지 담당자' 자리를 끝내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 재수가 없었다. 재수없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없었다. 조용한 조직생활에서 이깟일로 '과민반응'하기도, '예민한' 신규직원이 되기도 싫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오지게 재수없는 그 날을 넘긴 지 얼마나 지났을까.



Rrr..

어느 날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 너머로 A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기민함이 또렷하게 A라는 것을 감지했다.

"홈페이지 담당자입니까. 나 A인데. "

내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전화를 끊어버릴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안녕하세요 A부장님."

"나 A인데, 우리 팀에서 요청했던 일이 왜 이렇게 느려? 도대체 업체랑 계약한지가 언젠데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되는거야?"

아니나다를까 수화기 소리가 옆자리까지 들릴만큼 고성과 윽박이 시작됐다.


"A부장님, 그 건은 A팀에서 요청하셨던 T직원에게 상세하게 이미 몇차례 설명 드렸습니다. 현재 업체에서 이슈가 있어 다소 시일이 걸릴 것이고 차주까지는 반영이 될 것이라고요. "

"그 멍청한 새끼가 이딴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나갔어?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 !!!"


그가 지칭하는 멍청한 새끼는 본인 팀의 부하직원인 T였다. 며칠 전 아침, 난처한 표정의 힘 없는 T가 나를 찾아왔었다. T가 A부장 때문에 얼마나 힘들지 한 눈에 보였다.

고압적인 자세와 고성, 폭언이 난무하는 사무실에서 매일 자신의 종 부리듯 닥달하는 그의 갑질 때문에 T가 겪을 고통이 충분히 예상되는 바였다.


T에게 진행 중인 사업의 진척상황과 요청한 부분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걸린다는 내용을 여러 차례 설명하던 내가 조심스레 T에게 말을 건넸다. "많이 힘드시죠?"

체념한 듯 힘 없는 표정의 T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체념을 넘어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보였다. "늘 그렇죠 뭐. 그 사람은. 저는 적응되서 뭐.. 전 괜찮아요. 선생님이 힘드시죠 뭐."

  

그 날 이후 며칠 내 퇴사한 T 덕분에 A의 분노는 더욱 커진 듯 했다.

담당자 T의 퇴사와 맞물려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을리 없다. A는 결국 모든 분노를 내 쪽으로 돌릴 참이었다.


"일을 그따위로 해? 도대체 계약을 무슨 생각으로 한거야?"

"..A부장님. 계약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고, 상부에서 결정한대로 업무는 정상적으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저는 미리 T에게 여러차례 설명 드렸고요. 불편하실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건.. "

"날 설득하지마! "

콜센터 진상고객도 이보다는 말이 통하지 않을까.

지금 이 대화가 회사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스러울 정도로, A의 수준은 낮았다.


"A부장님. 전 설득하려는게 아니라 팩트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궁금해하시는 부분에 대해서요."

"뭐? 니가 뭔데 나를 설득해? 설명하지 말라고 !! "

그럼 무엇 때문에 전화를 걸었단 말인가. 내용을 들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다만 나에게 폭언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는 건가?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조곤조곤 팩트를 전달하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까.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테니까! "

그 외에 더 많은 말이 들렸지만 웅얼웅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명확한건 그는 화를 낼 대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굽신굽신 정확히 뭔지 모를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깍듯이 잘못을 빌어줄 대상이 필요했다.


그가 그토록 화가 난 건, 오늘 감정 쓰레기통으로 고른 내 태도가 석연치 않아서다. 임금에게 신하가 머리를 조아리듯 고개숙여야 하는 을이 을 답지 못해서다. 감히 을이 갑을 가르치려 들어서다.


A는 우당탕탕 몇 분만에 주체하지 못하는 화를 고성과 발걸음으로 드러내며 사무실 문을 열어 제꼈다.


"나를 설득해? 나와!!! 누구야 당장 나와 방금 나랑 통화한 담당자!!"

그는 아직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듯 했다. 자리에서 키보드 위에 얹어놓은 내 손이 얼어붙었다. 갑작스런 공포로 머릿속 뇌의 아주 깊은 곳에서 시린 듯 높은 음역대의 삐-소리를 내며 위험신호를 발령했다.  


어쩐일로 자리에 있던 팀장이 위험을 감지한 듯 사무실 문 앞에 버선발로 나가 사람 좋은 너털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아이고 무슨일이십니까 A부장님"

"아니 저게 날 설득하려고 하잖아! 내가 사업을 안해봤는 줄 알아? 어디 날 설득하려 들어?!"

"아이고 A부장님 나가서 저랑 얘기하시죠. 여기는 사무실인데.."


팀장이 A부장의 몸을 막아세워 반대편으로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지가 내가 누군줄 알고 설득을 하려고 해.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나가면서도 A부장의 고성과 폭언은 지속됐다. 온 건물에 그의 분노가 울려퍼졌다.

"아이고 여기서 이러시면 안되지요. 직원도 인격이 있는 사람인데.."


팀장의 인격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

공포감으로 터질 듯한 심장이 제 리듬을 찾을 무렵, 깨달았다.


지금 내 인권이 침해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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