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 2014 작가 김보희의 'The Days'
|푸푸푸의 그림
|YONG의 글
30년 만에 내 방이 생겼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직 100%는 아니고, 70% 정도 내 방인 것 같다. 방 정리 전에는 30% 정도 지분에 불과했으니 이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간의 나는 대략 50%의 남의 물건과 20%의 먼지와 한 방에서 동거했다. 내 방이긴 했으나 남의 물건으로 가득한 그곳은 언제나 답답한, 내 방 같지 않은 내 방이었다. 가족 수 대비 집은 좁았다. 각자의 공간에 각자의 물건만 있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어차피’라는 생각이 들어 방 정리를 시도조차 하지 않고 오랜 세월을 그냥 살았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어딘가에 혼자 콕 박혀있어야 하는 성격이다. 보통은 방이 그러한 공간일 텐데 그러지 못한 나는 기분전환을 위해서 종종 방을 나갔다. (내 기억을 포함한) 가족의 기억, 시간이 묻지 않은 물건이 잘 정돈된 여행지의 숙소로, 물건이라고는 그림밖에 없는 단출한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곳들은 해묵은 기억과 먼지는 없고 적절한 온도와 습도, 향기가 있는 공간이다. 현재의 나만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유일한 곳들이다.
작년 7월 관람한 김보희 작가의 전시 <Towards>가 생각난다. 초록의 식물과 제주의 바다가 펼쳐져 있던 곳. 특히 김보희 작가가 4년에 걸쳐 그렸다는 ‘The Days’와 그 옆에 그려져 있는 제주의 바다 그림 'Being Together'을 한참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림 속 바다 수평선은 옆 벽면의 ‘The Days’ 속 바다와 이어져 마치 하나의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The Days’는 울창한 숲속을 두 벽면에 그대로 옮긴 것처럼 그린 초대형 그림이다. 한 면은 바다, 두 면은 숲속으로 이루어진 구성. 마치 자연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두 달 뒤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여전히 내 방은 그대로였다.
뿌리째 뽑아내는 것 같은 방 정리를 하게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어느 날 방탄소년단의 시즌 그리팅(달력)이 배송 왔다. 탁상 달력과 벽걸이 달력까지 구매 했는데. 이럴 수가. 놓을 곳, 벽에 걸 곳도 없던 것이었다. 물론 내 방에도 책상이 있긴 있다. 문제는 나의 온갖 잡동사니와 아빠의 먼지 쌓인 책과 LP, 가족의 앨범이 정신없이 뒤섞여 책상 본래의 쓰임을 잃은 지 한참이라는 것. 회사 다닐 땐 그래도 달력을 올려 둘 예쁜 데스크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없어졌으니 내게 남은 유일한 책상은 저것 뿐이다. 레트로 컨셉의 2021년 방탄소년단 달력을 그곳에 두자마자 한순간에 몇 년 묵은 채 굴러다니는 여느 잡동사니처럼 미워 보였다.
1단계. BTS 탁상 달력을 놓을 책상을 샀다.
쓰임을 잃은 책상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정이 안 가는 물건이었다고 변명해본다. 그 책상은 내 것이 아니었다. 아빠가 썼던 아주 오래된 물건이었다. 낡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누구의 세월도 남아있지 않은 새로운 책상이 갖고 싶어졌다. 이 나이에 첫 책상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내 방에 무심해도 너무 무심 했던 것 같다. 이번 방탄소년단 달력과 다이어리 컬러가 초록색이라 그에 어울리는 나무 디자인의 조립식 책상을 하나 구매했다. 그 무렵 산책 중독자였던 나는 집 근처 공원, 산의 나무 색깔이 그렇게 예뻐 보였고, 방탄소년단 최애 멤버 V의 마이크 색도 초록색이었으니, 내 방은 그렇게 초록색이 될 운명이었나 보다.
2단계. 초록의 생일 선물을 받았다.
내가 방 정리한다는 소식은 주변에도 꽤 놀라운 일이었는지, 방 꾸미기와 관련된 아이템들을 생일 선물을 받았다. 초록색 스탠드, 방탄소년단 RM이 사 갔다는 향수 ‘모시글렌’ 향의 방 스프레이도 받았다. 산과 나무, 물줄기, 물이끼, 무화과 향이 나는 스프레이다. 작은 나무 분재 화분도 받았다. 창피한 일이지만 내 손으로 식물을 기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나둘, 물건과 향을 들여놓으면서 그보다 더 많은 물건과 먼지를 버렸다. 드디어 조금씩 숨 쉬는 방이 돼가는 것 같았다. 방 정리와 함께 들여온 이 식물이 죽지 않고 온전히 숨 쉴 수 있도록 가꾸면 자연스럽게 이 방도 더 오래 상쾌한 숨을 쉬는 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보다 책상 위에 놓인 식물을 보는 일이 더 많으니까.
3단계. 커튼을 달았다.
숨쉬기 좋은 곳이 되자 이제는 좋은 빛이 들어오면 좋겠다 싶었다. 커튼이라고는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낡은 창문에게 옷을 입혀주기로 했다. 살몬색 커튼이 창 밖의 바닷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고 있는 홍보 웹사이트 사진에 반했다. 분명 2D 사진이었는데 어쩐지 그 순간 내 눈엔 3D처럼 보였다. 친구들에게 생일 선물로 이 커튼을 갖고 싶다고 카톡방에 링크를 보냈다. 창문에 설치하니 햇빛을 받아 오렌지빛으로 방이 물든다. 웹사이트 속 바다 풍경은 조개껍데기 모양의 인센스 홀더로 그 느낌을 대신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김보희 작가 전시회를 갔던 사진들을 다시 보며 놀랐다. 꾸며진 내 방의 모습이 바다와 나무로 가득한 전시 공간과 꽤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가 바뀌었다.
4단계. TV를 샀다.
오래전부터 내 집이 생기면 나만의 영화관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게 될까 싶었던 방이 변해가고, 내가 변해가는 걸 보며 영화관 로망도 실현해 보기로 했다. 마침 백만원 남짓 대폭 할인된 가격에 55인치 4K TV를 구매할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 영상과 좋아하는 영화가 또 새롭게 보였다. 여전히 낡은 벽지와 오래전에 설치한 붙박이장 안에 가족의 물건이 꽉 차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최소 비용, 최대 효과였다.
5단계. 천장에서 물이 샌다.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방 한 벽면을 답답하게 메운 붙박이장을 볼 때마다 부수고 치워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곤 했다. 그날도 그렇게 붙박이장 군데군데를 쏘아 보다가 장 한쪽 천장이 흥건히 젖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장 벽지는 말랐다 젖었다 했고, 누런 얼룩이 겹겹이 쌓여 흔적으로 남았다. 급기야 천장 벽지에 구멍을 내서 대야에 떨어지는 물을 받기도 했다. 관리소와 집주인의 어이없는 대응으로 한 달 가까이 고쳐지지 않고 아직도 설왕설래 중이다. 똑. 똑. 새 책상에 앉아 작업하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도로 빈티지가 되어 버린 내 방. 조만간 도배를 해야할 것 같다.
현실은 김보희의 그림처럼 완벽히 아름다울 수 없다. 그림은 그림이고 미술관은 미술관이고 방은 방일 뿐. 완벽은커녕 어느 순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심란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아직 나의 방 정리는 끝나지 않았다. LIFE GOES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