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계간지 <우리 아이들> 가을편에 실은 일상 속 성인지감수성 이야기
작년에 아웃박스의 성평등 수업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습니다. 올해 이어가게 되면서 무슨 글로 마음을 전하면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이번엔 아웃박스 소속 교사가 아니라 시민 개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성인지감수성을 고민하고 사는 일상을 산뜻하게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어? 꿈꾸는 초식공룡? 이거 혹시….”
어느 날, 독서모임에서 발제해야 할 책이 말썽이었다. 좀더 정확히는 책이 아니라 책을 소화할 수 없는 내 두뇌가 말썽이라고 해야 한다. 이미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책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굳이 골라보았는데, 나에게도 영락없이 어려웠다. 모임에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럴 땐 일등시민 블로거에게서 고견을 얻는 게 제일이다. ‘이런 것도 설명이 있을까?’ 싶어도 찾아보면 기가 막히게 면밀히 공부하고 공유까지 해주는 고마운 분들.
...음, 하지만 실패다. 블로그에도 온통 난해하다는 불평 반, 오독일 것이 거의 분명한 해석 반이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중 독서토론 기록 하나를 무심코 클릭했다. 토론을 이끈 발제 질문과 유의미한 의견들을 옮겨적어 둔 글이었다.
질문도 괜찮고... 토론 참여자마다 개성에 따라 의견의 결이 조금씩 다른 것도 좋다. 오, 여기서 건지면 되겠다! 얼추 질문을 베껴두고 창을 닫으려는데, 포스팅 말미에 여러 번 눈길을 두게 되는 문장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 포스팅은 2019년 7월 23일에 쓰여졌는데, 거진 일 년이나 지난 뒤에 글을 수정한 흔적이 이렇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다른 멤버가 글쓴이의 주장에 지적을 했다는데도, 아마 그는 자신의 의견에 확신이 있었으니 기록으로 남겼던 것일 테다. 그런데 무려 일 년이 지난 뒤에 구태여 이 게시글을 다시 찾아서 – 열어서 – 수정한 것이다. 번거롭게! 게다가 마치 그런 생각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삭- 지워 감출 수도 있는데, 굳이 가운데 줄을 그어 제 과거 의견을 그대로 남겨두고, 수정한 날짜와 함께 ‘반성한다’고 남겼다. 이 생각이 왜 문제적인지, 어떤 반성을 한 것인지까지는 적어두지 않아서 맘대로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가 반성의 의미로 기꺼이 번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어쩐지 그 흔적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글이 좋으면 글쓴이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라, 주인장이 블로그 이름을 뭐라고 지었나 보았다. 호호 이름 귀엽네. 어? 꿈꾸는 초식공룡? 이거 혹시….
“시원! 혹시 블로그 해요?”
“응! 해요.”
“친구들이랑 독서모임도 한다고 했죠. 혹시 이 블로그 시원 거예요?”
“오?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요 제 거예요.”
워! 나의 궁예력 오진다! 그러고 나니까 내가 아는 시원의 목소리가 덧입혀져 익숙하고도 새롭게 읽혀 배시시 웃음이 난다. 이를 테면 이런 부분.
‘이해 못했을 수 있다. 근데, 그럴 수도 있지.’
‘예전엔 부끄러운 생각을 했다. 근데, 뭐 그랬을 수도 있지.’
‘생각이 바뀌었다. 그럴 수도 있지!’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무책임해서 나오는 표현은 아니었다.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무수히 자빠져봐야 하는 법이다. 자빠지기 두려워서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해서는 걷는 법을 터득할 수 없다. 그가 쓰는 ‘그럴 수도 있지’는 제대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마음껏 삐끗 생각해보기’를 허용하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주 그런다.
“그 이후에 생각해봤는데, (대충 반대의견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말 블라블라).”
“(…) 그랬지. 근데 내가 그때는 잘못 생각했던 거 같아. 번복할래. 헤헤헤.”
그는 모르겠다는 말, 결정을 보류하는 말도 잘한다.
“섹트가 나쁜가? 청소년들에게도 당연히 성적 욕망이 있고 자기결정권도 있는걸. 근데 성인에 비해 표출할 방법이 없잖아. 음... 하지만 그렇게 표출하다 보면 위험에 처할 확률도 높은 편이긴 하겠네. 그래서 보호해야 하는 것도 맞긴 한데... 사실 보호라는 미명 아래 청소년은 계속 무성의 존재가 되어 왔단 말이지. 음... (한참 재고 따져보더니) 에이, 이 문제는 아직 모르겠어요.”
성인지감수성 교육한다면서 뒤처지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계속 배워야 했다. 어떤 작은 이슈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일 만큼, 공부할 주제들이 쏟아졌고 그때마다 입장을 정해야 했다. 공부할수록, 성인지감수성 기르기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의 연속이다. 설리와 현아를 욕했었고 뒤늦게 그들을 응원했다. 모 정치인의 행보를 열렬히 응원했었고 뒤늦게 드러난 그의 성폭력 행적에 비추어 지난 행보를 재평가했다. 흑형을 칭찬으로 썼고 이제는 혐오표현이라 부른다. 합리적이라고 여겼던 내 안의 차별적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은 무척 창피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때마다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기 싫어서 갖은 변명을 동원해 우겼지만, 결국 ‘과거의 나’가 ‘지금의 나’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항복하고야 말았다. 그런 과정을 내 친구 시원은 때마다 더 가뿐하게 해냈다. 아마 마법의 주문 덕분이렷다.
번복하는 것이 틀린 걸 끝끝내 우기는 것보다 낫다. 지금은 맞은 내가 내일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참 어렵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낼 때 우리는 차차 어른이 된다. 유연함은 ‘척’할 수 없다. 대화하다 보면 고집부리는 성미는 금방 탄로나고, 사람이 알량해져 버린다. 그래서 마치 생각하기를 진탕 연습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유연함을 자주 부러워하게 된다. 그런 습관이 부쩍부쩍 시원을 자라게 한다. 그래서 시원이 나보다 어른이다, 나보다 아홉 살인가 어린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