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Oct 12. 2021

헐, 의사는 다 남자로 간호사는 다 여자로 그렸네?

아웃박스 수업 이야기 - 직업 속 성 고정관념 발견하기


보통 학생이 직접 생산한 자료는 수업 시간에 반응이 좋다. 5학년 YBM 6단원 <What does he do?> 수업 ppt에 쓰겠다고 학생들에게 직업인을 손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받은 100여 명의 그림을 살펴보는데 어라? 여자 직업, 남자 직업이 갈려 있다?


경찰, 버스운전사, 과학자, 개발자, 군인, 축구선수, CEO, 의사, 비행기조종사, 판사, 소방관은 남자로 그렸고(직업마다 정도가 다르지만 평균 약 76%), 유치원 교사, 간호사, 승무원, 요양보호사는 좀더 높은 비율(약 84%)로 여자로 그렸다. 


치마입은 남자나 머리 짧은 여자로 그렸을 수도 있지 않냐, 오히려 내가 고정관념 있는 거 아니냐 묻는다면 할 말 없지만^^…(나중에 학생들에게 확인하니 맞단다.) 옳거니, 수업자료로군…(씨익)


다음 수업 시간. 그림의 공통된 특징을 찾아보게 했더니 눈 빠지게 들여다본다. 몇 눈치 빠른 학생들이 힌트를 주었다. '차별'이라고 한 학생도 있었고, '성별'이라고 주는 학생도 있었다. 이내 자신들이 그린 직업인 속 성 고정관념을 찾아내곤 단체로 엄청 놀란다.



학생들이 그린 직업인, 성별을 주문한 적 없지만 대체로 치우친 채로 드러나 있다.

“헐! 진짜 의사는 다 남자네!!”
“와 나 소름 돋았어, 대박이다.”


ㅋㅋ그래 이렇게 살아있는 반응이 돌아오면 기분 째지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어요. 여자 의사가 있는 것도 알고, 남자 승무원 있는 것도 알고, 간호사들이 이렇게 짧은 치마를 입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제대로 생각해 보면 다 알고 있는 것들이지요. 그런데 직업인을 그리려고 했을 때 ‘무심코’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 그게 이렇게 비슷한 모습이었나 봐요. 이런 걸 뭐라고 할까요?”


"성별 고정관념이오."



배운 적도 없다는데 더듬더듬 대답한다. 그러면서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영상 하나 보면서 짚어줬다. 영국 초등학생들 대상으로 실험한 건데, 61개 직업은 남자, 5개는 여자로 그렸다는 내용과 함께, 실제 직업인들을 등장시켜 고정관념을 깰 경험을 주는 수업이었다. 나도 능력이 된다면 이렇게 수업하고 싶었는데 흑… 언젠가 할 거야….

영상 출처 - https://youtu.be/qv8VZVP5csA


"Inspiring The Future - Redraw The Balance"


“영국 어린이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나 봐요. 어른들한테 그려보래도 아마 비슷할 걸요. 그러니까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이에요. 그래도 ‘앞으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될까? 무얼 하고 싶나?
’ 고민하는 순간이 올 때 여러분이 보다 다양하게 상상해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얘길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고정관념 어디서 왔을까요?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을까요?”


(여기까지가 1차시)







(이어서 2차시)

학생들은 고정관념을 심어준 원인으로 '미디어'와 '어른들'을 꼽았다. 많이 보고 들은 게 자기 생각이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일단 고정관념을 깬 직업인들을 좀 보여주었다. 유튜브 ceo가 여성이라는 데에 적잖이 놀라더라. 우리 주변의 고정관념의 말들도 나눠 보고, 이런 말에 익숙해지다 보면 반쪽짜리 꿈을 꾸게 되는 건 아닐까, 더 넓게 상상해 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ppt는 대충 사진만 퍼와서 발로 만들고 입으로 다 털었던 수업...


직접 주변으로부터 들었다는 말 중에 “남자애가 왜 이렇게 순수해”라는 표현에 헉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순수하다의 반댓말이 뭘까요 물었더니 “음흉하다? 응큼하다?”라고 떠올리곤 기분 나빠하는 어린이들. “경찰 말고 여자 직업을 가져.”라는 말을 들었다는 어린이도 발표하면서 울상. 친구라서 같이 놀았는데 “여자애(남자애)가 왜 남자애들(여자애들)이랑 놀아? 사귀냐?” 를 지겹게 듣는다고.

"보통 모르는 사람이나 스쳐갈 어른이 아니라 가깝고 아껴주는 어른들이 이 말을 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아빠예요, 할머니예요, (줄줄이 가족 혹은 학교, 학원의 선생님이라는 증언)"

"그러니 의도는 여러분이 상처받길 바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걱정과 애정이었을 거예요. 또래와 다르면 못 어울릴까봐, 오해를 받을까봐, 앞길이 험난할까봐...그래도 속상하긴 했겠다!

만약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뭐라고 할래요?” 


답변이 꽤 적나라하다.


“꼰대세요?” ㅋㅋㅋ

"라떼는 또 시작이네." ㅋㅋㅋㅋㅋ

"좋게 말해주세요."
"요즘엔 그런 말 안 돼요."

"제 부모님이세요?"

...
“듣는 사람 입장 생
각해 주세요

제 일은 제가 결정할게요.”



즉시 이렇게 대꾸할 수 있다면 그것도 방법이겠지만, 어린이들이 더 넓은 세계를 상상하고 있다고 어른들에게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 아까 고정관념을 확인할 때 후회한다는 듯이 ‘다시 그리면 안 되냐’고 하던데, 그래, 다시 그려보자. 그리고 선생님이 대신 어른들에게 (이렇게 브런치를 통해) 전해줄게요.

경찰 말고 여자 직업을 고르라는 말을 들었단 학생은 꿈을 이룬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뿌듯해했다. 머리묶은 남성 메이크업아티스트, 심지어 치마 입은 남성 모델을 그린 학생도 있었다. “이러면 여잔 줄 알잖아” 하는 친구한테 “그래서 He is~라고 설명했잖어.”하고 대꾸하면서.

두 시간짜리 활동 한 번에 갑자기 인식이 훌쩍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익숙하게 생각하던 방식 바깥에도 재미난 세계가 있다는 걸 한 번쯤 경험해 본 건 의미있지 않겠나. 


학생용 활동지 일부 

나에겐 다소 지겨운(?) 이슈지만 학생들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담이어도 가끔은 이런 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